
“우리가 가진 기술력을 다 쏟아내보자. 이런 절박한 마음으로 임했어요. 린데라는 글로벌 기업이 외산이 아닌 국산 탱크를 쓰기로 하면서 크리오스(CRYOS)라는 회사를 믿고 내린 결정이니까요.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마음이 가장 컸죠.”
크리오스 장병화 부사장의 얼굴에 까만 웃음이 번진다. 이 웃음을 보기까지 딱 일주일이 걸렸다.
지난 6월 말의 일이다. 크리오스가 4톤급 액화수소 저장탱크로 대형사고(?)를 쳤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한국가스안전공사 에너지안전실증연구센터에서 진행된 시험평가에서 자연기화율 0.2%대의 놀라운 성적표를 받아든 것. 소식을 듣자마자 부산행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단열성능 입증
부산 화전공단에 있는 크리오스의 공장동에 들어서자 보얀 백자 빛이 도는 탱크 하나가 눈에 든다. 그 앞에서 한 직원이 터보 펌핑 시스템 장비를 연결해 진공을 잡는 중이다.

“영월에 가 있는 4톤 탱크의 쌍둥이 제품이죠. 린데코리아에 총 네 기를 납품하기로 돼 있어요. 시험평가 때 린데코리아, KGS(한국가스안전공사) 직원들이 현장에 같이 있었는데,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라더군요. 박수와 격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4톤급 탱크는 하루 기준 자연기화율 0.9% 이하면 합격으로 본다. 기화율 수치가 낮으면 낮을수록 단열이 잘된다는 뜻이다. 크리오스의 탱크는 이 수치를 네 배가량 뛰어넘는 0.2%대를 기록했다. 일본의 경쟁사에도 뒤지지 않는 세계 최고 수준의 단열성능이다.
“6월 23일에 인천 SK에서 가져온 액화수소를 탱크에 처음 주입해서 안정화 기간을 거쳤어요. 실 테스트는 6월 29일부터 30일까지 24시간 동안 진행이 됐죠. 테스트 당일 40℃에 이르는 폭염으로 걱정이 많았어요. 그 와중에 이런 결과를 내서 뿌듯합니다.”

당시 영월의 최고기온을 검색해보니 33℃로 나온다. 체감온도가 40℃에 육박했다는 말이 과장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번 결과는 큰 의미가 있다. 산업부는 지난해 4월 규제샌드박스 신청을 받아 21개 과제를 승인했다. 그중 하나가 ‘산업용 액화수소 공급 실증’이다. 산업용 가스 기업인 SK머티리얼즈 에어플러스와 린데코리아가 본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용인반도체클러스터, 평택 등 반도체공장 부지에 액화수소 저장시설을 세우고 탱크트레일러로 운송 받은 액화수소를 저장한 뒤 기화해서 전용 배관으로 공급하게 된다. 수소는 반도체 제조를 위한 극자외선(EUV) 공정의 세척 가스로 쓰임이 있다.

“아시다시피 액화수소는 기체수소에 비해 운송효율이나 저장효율이 높아요. 튜브트레일러로 열 번에 걸쳐 실어나르는 양을 한 번에 받을 수 있죠. SK만 해도 수요처를 확보하지 못해서 인천 액화수소플랜트의 일부만 돌리고 있고, 창원 액화수소플랜트 같은 경우에는 하이창원이 디폴트 상태에 빠지면서 경영권이 대주단에 넘어간 상황이죠. 국산 탱크가 상용화되어야 그 수요를 빠르게 늘려갈 수 있고, 액화수소 플랜트 운영도 정상화될 수 있다고 봅니다.”
국산 액화수소 탱크 출시는 구매비 절감뿐 아니라 유지보수에도 큰 도움이 된다. 외산 탱크에 비해 비용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어 액화수소 유통을 위한 경제성 확보에 꼭 필요하다. 기화율 0.2%대를 기록하면서 뛰어난 성능을 확보한 점이 고무적이다.
크리오스는 창원 대원수소충전소에서 진행 중인 ‘액화수소 충전소용 저장탱크 및 수소공급시스템 기술개발’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지난해 탱크 설치를 완료했지만, 하이창원의 경영권이 대주단에 넘어가면서 액화수소 충전 실증이 늦어지고 있다.
“하루빨리 액화수소를 받아서 실증을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창원 액화수소 플랜트에서 받는 게 최선이지만, 그 대안으로 SK에서 액화수소를 받아서 진행할 수도 있겠죠. 올해 실증 평가를 완료하고 액화수소 수요처를 빠르게 늘려가는 것이 하이창원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슈퍼인슐레이션 적용한 이중 탱크 구조
장병화 부사장은 지난해 8월 크리오스에 합류했다. HSD엔진에서 사명이 바뀐 한화엔진의 고문으로 재직하다 크리오스에 초빙됐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해외 발전소 구축 사업을 비롯해 여러 업무를 수행한 이력이 있어요. 그 노하우가 이번 4톤급 액화수소 탱크 제작에 반영이 됐다고 볼 수 있죠. 초저온, 극저온 분야 전문기술에 대한 이해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크리오스의 훌륭한 인적 자산을 기반으로 설계부터 구매, 생산, 품질 관리까지 업무 전반의 운영총괄을 맡고 있습니다.”
액화수소 탱크는 극저온 단열을 위해 ‘슈퍼인슐레이션’이라 부르는 MLI(Multi Layer Insulation) 방식을 적용한다. 외조와 내조로 구분된 이중 탱크 구조로, 내조탱크에 단열재 시트를 여러 겹 감아 열의 침투를 막게 된다.

“단열 시공에는 MLI의 두께나 감는 법만 중요한 게 아니라 내·외조 탱크와 지지대의 세부 설계, 배관, 단열 소재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요. 크리오스는 LNG(액화천연가스)로 시작해서 지난 20년간 초저온 분야에 특화된 탱크 시공 기술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죠. 그 기술력과 경험을 녹여 열차폐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고 보시면 됩니다.”
장병화 부사장을 따라 단열평가실로 향한다. 한창 제작 중인 2톤급 저장탱크가 가로로 놓여 있다. 장 부사장은 “단열재만 해도 성적서만 보고 구매를 한 게 아니라 해외 업체를 직접 찾아 제품을 확인한 뒤 구매를 진행했다”고 한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최고급 소재를 구매해서 쓰고 있죠. 린데나 에어리퀴드 같은 해외 선진사의 특허기술을 1년 넘게 분석하고 이를 회피해서 개선한 방식을 설계에 적용했어요. 사전에 기댓값을 설계에 녹여 컴퓨터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게 되는데, 영월에서 진행한 실 테스트에서 팀원들이 의도한 대로 결괏값이 나왔어요. 엔지니어 입장에서 이만큼 짜릿한 순간도 없어요. 그간의 고생을 모두 보상받은 기분이 들죠.”
탱크 크기를 4톤으로 간 데는 이유가 있다. 국내에서 운용하고 있는 액화수소 탱크트레일러 용량이 3톤이라 한 번에 한 통을 채울 수 있다.
크리오스는 산업부 과제로 액화수소 수송용 탱크도 개발하고 있다. 공장 안에서 3톤급 수송탱크 제작이 한창이다. 개발을 완료한 2.5톤급 액화수소 탱크트레일러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외형은 조금 다르다. 2.5톤급 탱크는 외형이 매끈한 데 반해 3톤짜리는 보강재가 갈빗대처럼 튀어나와 있다.

“구조 강화를 위한 형상유지용 지지대라 할 수 있습니다. 국내 도로교통법상 액화수소 탱크의 최대 길이를 전장 13m로 규정하고 있어요. 외조탱크의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액체수소의 저장용량을 늘리기 위해 내조탱크의 크기를 최대한 키우다 보니 지지대를 바깥으로 뺄 수밖에 없었죠.”
내조와 외조 사이의 빈 공간을 최대로 확보해 단열을 잡게 된다. 한국가스기술공사와 디앨이 공동으로 개발한 3톤급 액화수소 수송용 탱크트레일러도 겉모양이 유사하다.
반도체 업계에 액화수소 공급
린데코리아에 납품하기로 한 제품은 세로 형태의 입형 탱크다. 수소탱크의 경우 입형보다는 횡형을 선호한다고 한다. 하지만 반도체공장이 있는 현장 부지가 협소해 입형으로 제작 중이다.
“액화산소 탱크나 액화질소 탱크의 경우에는 입형을 선호해요. 자체 액의 무게로 위에서 누르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기계적인 에너지가 덜 들어가니까요. 하지만 수소는 물성이 워낙 가벼워서 예외라 할 수 있죠. 방호벽을 낮게 쌓아도 되기 때문에 부지 면적이 충분한 곳은 횡형을 더 선호합니다.”
옆으로 긴 가로형 탱크는 구조적으로 중심을 유지하기 위해 보강재가 더 많이 들어간다. 보강재는 외부 열이 탱크 안으로 들어오는 주요 경로가 된다. 이런 구조재를 어떤 형태로 어디에 위치하도록 설계하느냐에 따라 단열성능에 큰 차이가 난다. 오랜 경험이 있어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창원 대원수소충전소에 설치한 1톤급 탱크가 횡형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1.3톤에 해당하죠. 국내 수소충전소로 보면 1.5톤 정도가 무난합니다. 버스차고지처럼 수소충전량이 많은 곳은 탱크를 두 개 정도 놓고 3톤짜리 탱크트레일러로 액화수소를 받아 기화해서 사용할 수 있죠. 기존 기체수소충전소 설비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충전용량을 늘리는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어요.”
크리오스는 1톤부터 4톤까지 다양한 용량의 액화수소 탱크를 제작하고 있다. 현재 6톤짜리 제품의 설계도 진행 중이다.
탱크의 크기가 작을수록 증발률이 오르기 때문에 단열을 잡기가 더 어렵다. 4톤급 탱크의 하루 기화율 기준이 0.9%라면 1톤급 탱크의 기준은 1.5%다. 결국 수소트럭 같은 차량용 액화수소 연료탱크 제작이 가장 어렵다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크리오스의 도전 과제로 남아 있다.
“반도체라는 게 국가 기간산업이잖아요. 이런 곳에 검증이 완료된 외산 제품이 아니라 국산 개발품을 넣는다는 게 상당한 모험입니다. 이런 정책 판단을 내리기까지 힘든 과정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고, 회사에서도 그 믿음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죠. 이번에 결과가 잘 나와서 직원들도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그동안 액화수소 탱크 개발에 나선 업체는 많지만, 액화수소를 넣어 KGS의 정식 시험을 거친 사례는 크리오스가 유일하다고 한다. 이번 결과를 계기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로 대표되는 국내 반도체 업계에 액화수소 공급이 시작되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장병화 부사장은 “에너지기술평가원의 기술개발 과제로 선정이 되면서 정부의 지원을 받은 부분이 제품 개발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잊지 않는다. 3톤급 액화수소 수송용 탱크트레일러, 1톤급 액화수소 저장·공급 시스템 개발은 모두 산업부 과제로 진행 중이다.
이전 윤석열 정부에서 연구개발 예산을 삭감하면서 큰 잡음이 일었다. 실력을 갖춘 업체를 엄선해서 기술개발 기회를 열어주고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초기시장을 열어가고 있는 수소업계에 꼭 필요한 일이다.
4톤급 액화수소 저장탱크가 눈앞에서 보얀 빛을 내뿜고 있다. 이 정도 물건을 만들어낸 회사의 직원이라면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