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희 정책이면 어떻고 김대중 정책이면 어떻습니까? 필요하면 쓰는 거고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이면 버리는 거죠.”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유세 당시 대구·경북 지역을 돌며 ‘국민통합’을 강조할 때 자주 쓴 말이다. 그는 진영 논리와 이념 논쟁을 타개하기 위해 실용주의를 전면에 세웠다.
“박정희 정책도 김대중 정책도, 필요하고 유용하면 구별 없이 쓰겠다”는 말은 대통령 취임사에도 그대로 담겼다. 전국에 재생에너지망을 구축하는 ‘에너지고속도로’ 공약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부고속도로 사업에 빗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용주의 에너지 정책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으로 새 정부에서 추진될 에너지 정책에 관심이 쏠린다. 이번 에너지·환경 분야 공약이 지난 20대 대선과 비교해 후순위(4순위→10순위)로 밀리긴 했지만, 기후·에너지 정책은 한 나라의 산업·통상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월 11일에 취임한 문신학 신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이 취임식 자리에서 기후에너지부 신설과 관련해 “기후, 에너지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이며, 산업과 통상 정책과는 본질적으로 긴밀히 연결될 수밖에 없다”고 한 말에 주목해야 한다.
새 정부는 2040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폐쇄를 추진하고, 탄소중립 산업법을 제정해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그린수소 등 탄소중립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 한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대’를 주요 공약으로 내건 만큼 태양광·풍력 등 보급 확대와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활성화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특히 에너지고속도로는 지역간 전력 수급 불균형을 맞추기 위한 환경분야 핵심 공약이다. 2030년까지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향후 2040년 완공을 모표로 유(U)자형 한반도 에너지고속도로를 건설해 호남과 영남의 전력망을 잇고 동해안의 해상풍력까지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확대되면 간헐성·변동성에 따른 출력제한 문제를 겪게 된다. 제주와 전남에서 이미 현실화되면서 재생에너지 사업주와 갈등을 겪고 있다. 다만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수소를 생산하는 비용이 기본적으로 높고, 한전의 계통 전력이 아닌 직접전력거래계약(PPA)으로 재생에너지 전력을 구매해서 수전해에 활용하는 제도적 기반이 명확히 마련되지 않았다.
안산의 대부도 수전해 실증 현장의 사례에서 보듯 규제샌드박스가 아니면 사업을 정상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렵다. 이런 제도 미비와 비용 문제로 원자력발전(이하 원전)으로 수소를 생산해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원전 전력으로 만든 핑크수소도 저탄소 수소에 든다. 원전의 방사성 핵폐기물 처리는 여전히 난제지만, 전력 생산과정에서 온실가스 배출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 달성에 긍정적이다.
또 많은 전력을 필요로 하는 AI(인공지능) 산업 육성을 공언한 만큼 문재인 정부의 ‘원전 폐지’ 정책을 고집할 일은 없어 보인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정책과도 배치되지 않는다. 재생에너지보다는 화석연료, 원전 확대에 집중하고 있고, 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구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등 빅테크 기업들도 SMR로 대표되는 원전 기술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은 새 정부 출범 첫날 체코의 발주사인 두코바니II 원자력발전소와 신규 원전 계약을 체결했다. 원전 2기 건설에 4,000억 코루나(약 25조 원)의 돈이 들어가는, 체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투자에 든다.
실리와 국익의 관점으로 보면 ‘K-원전’은 K-방산이나 K-조선만큼 수출 효자 산업에 든다. 실제로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경선 당시 문재인 정부의 ‘2050 탈석탄’ 정책을 10년 앞당기는 대신, 원전의 비중을 낮추기 않고 유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바 있다.

새 정부는 실용주의 관점에서 기존 원전 정책을 유지하면서 신재생에너지 확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큰 흐름에서 중국의 에너지 정책과도 닮아 있다. 중국은 이념과는 무관하게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재생에너지, 원전 등 에너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고, 그 노력은 상당한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전세계에서 생산된 그린수소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로 중국은 수전해 시장에서 큰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수소를 정책사업으로 보고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규제를 빠르게 혁신하면서 주도권을 잡았다.
중국식 실용주의를 벤치마킹하면서 일본 수소 정책의 핵심 보조금 사업인 차액계약(Contract for difference, CfD) 제도 등을 활용해 기준 가격과 시장 가격의 차이를 보조해 수전해 수소 생산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원전기반 수소’에 대한 유럽의 고민
경북 울진은 원자력수소국가산단 조성에 집중하고 있다. 울진군은 현재 가동 중인 원전 8기에 건설 허가를 앞둔 2기를 합해 총 10기의 원전을 운영하게 된다.
바로 이곳 울진지역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해서 핑크수소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 수소를 울진군 죽변면 후정리에 있는 원자력수소국가산단 기업에 공급하고, 포스코 포항제철이나 삼척의 화력발전소 등 대량의 수소 수요처에 배관으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전기반 수소를 대하는 유럽의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유럽연합(EU)은 원자력에서 나온 전기로 수소를 생산하는 원전기반 수소를 ‘저탄소 연료’로 분류하는 결정을 2028년까지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유럽연합위원회(EC)가 ‘저탄소 수소’에 대한 정의와 인증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규정을 검토하고 있지만, 원자력발전소와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한 수소생산 방식의 분류 여부를 2028년 7월까지 유보하기로 하면서 관련 사업은 정책 공백 상태에 놓이게 됐다.
원전산업 단체인 뉴클리어 유럽(Nuclear Europe)의 에마뉘엘 브루탱(Emmanuel Brutin) 사무총장은 이번 결정을 두고 “정당한 이유 없이 3년을 유예하는 것은 재생에너지를 통한 수소생산 방식에 불공정한 경쟁 우위를 제공한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프랑스, 폴란드, 스웨덴 등 원전 지지국은 에너지 전환의 핵심 에너지원으로 원전의 역할을 인정해달라고 줄곧 요구해왔다. 반면에 독일, 덴마크, 스페인 등은 방사성 폐기물 등 환경 리스크를 이유로 원전을 일부 녹색 정책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2030년 목표에는 원전을 유보했지만, 2040년 중장기 계획에는 이를 반영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러나 이번 초안에도 원전기반 수소가 제외되자 강경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가 전체 전력의 70% 이상을 원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의 기류도 감지된다. 최근 독일이 EU 법률 내에서 원자력 전기를 재생에너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을 더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냈다. 이런 기조 변화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공급 중단 이후 에너지 가격 상승에 직면한 독일 산업계의 현실적 고민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원전 폐기를 보류한 벨기에, 신규 원전 건설 추진에 나선 체코, 폴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에 불고 있는 ‘원전 부활’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다. 에너지 안보, 전기요금 안정, 탄소 감축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 또한 ‘실용주의’란 말로 포장할 수 있다.
그 배경에는 재생에너지 전기로 수소를 생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경제성이나 기술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유럽 국가들의 고민이 있다. 더불어 재생에너지, 수전해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고 있는 중국에 대한 견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담겨 있다.
‘기후에너지부’ 신설
실용주의자는 명분을 두고 다투는 일을 꺼린다. 성장과 분배, 보수와 진보, 수도권과 지방, 영남과 호남 등 사회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부문에서 해결책을 내놓으려 한다.
원전과 재생에너지도 여기에 든다. 에너지 전환이 재생에너지 중심으로 가는 것은 맞지만, 가동 중인 원전을 멈춰 세울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탈원전’이 아닌 ‘감원전’이 이재명 정부의 정책 기조라 할 수 있다.
새 정부의 에너지 공약을 보면 △에너지고속도로 건설 △재생에너지 생산지와 대규모 산업 지역을 연결하는 ‘지능형 전력망’ 구축 △탄소중립 산업 해외 진출 지원 △햇빛연금과 바람연금 확대 등이 포함돼 있다. 또 공약 실현을 위한 정부조직 개편안으로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예고했다.
국회미래연구원이 지난 5월에 발간한 60쪽 분량의 ‘산업정책 추진체계 및 정부조직 개편방안’ 보고서에 그 근거가 잘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산업부·중기부로 기업 규모에 따라 주무 부처가 분리되어 있어 산업지원 정책이 단절되고, 기능의 중복과 역할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또 산업부와 환경부 간의 정책 칸막이,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의 실질적 역할 부재로 부처 간 협력과 조정이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한다.
가령 하수처리장의 유기성 폐자원(슬러지)으로 생산한 바이오가스를 수소로 정제해 수소차 충전에 활용하는 경우가 여기에 든다. 여러 부처에서 담당하는 이런 유의 사업은 사업 추진 자체가 어렵거나 더디게 추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산업부와 중기부를 통합해 산업정책과 기업정책을 일원화하고, 환경부 중심의 기후정책, 산업부 중심의 에너지 정책 기능을 통합해 정책 실행력을 강화하려면 정부조직 개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부 유럽 국가에서 기후와 에너지 영역을 통합한 부처를 신설한 후 기후변화 대응력이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덴마크, 영국, 독일, 네덜란드는 부처 신설 전후 5년간 온실가스 배출량 저감률이 평균 5%에서 18%로 증가했다.
나라별 지표를 보면 덴마크가 4%에서 25%(△21%)로 저감률이 가장 높았고, 네덜란드 3%에서 20%(△17%), 독일 2%에서 10%(△8%), 영국은 12%에서 15%(△3%)로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달리 기존 부처를 기후정책 주무 부처로 지정하는 방식으로 개편한 프랑스, 미국, 일본은 개편 전후 5년간 온실가스 배출량 저감률이 평균 7%에서 6%로 유의미한 변화가 없었다.
기후에너지부 출범과 관련해 업계나 정부 부처 내 의견이 조금씩 갈리지만, “기후위기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면서 사회·경제 문제도 함께 풀어갈 통합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신학 산업부 1차관은 취임식 자리에서 “기후에너지부 신설은 시대적 흐름을 반영한 정책 변화로 이해한다”라며 “국정기획위원회와 장관 등과 긴밀히 협의해 산업부의 역할이 조화롭게 반영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문 차관은 과거 문재인 정부 때 산업부 원전산업정책관으로 탈원전 정책 시행에 참여했다 2020년 12월 월성 원전 1호기 폐쇄에 관한 감사원 감사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이력이 있다. 그런 그가 대법원 무죄 선고 이후 일선에 복귀해 기후에너지부 신설이라는 이재명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를 추진하게 된 점은 아이러니하다.
앞으로 새 정부가 조직 내 갈등을 유연하게 조정하면서 기후위기 문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풀어갈지가 관건이다. 수소사업의 방향성도 기후에너지 관점에서 재생에너지와 더 밀착하는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 ‘청정수소’나 ‘저탄소 수소’라는 포괄적인 개념 안에서 원전 수소의 정책적 수용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고효율 고온수전해(SOEC) 기술 등 원자력 연계 수소 생산 핵심 기술에 대한 연구개발과 투자, 기존 원전과 연계한 소규모 실증 프로젝트가 우선적으로 추진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