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완전한 ‘자원 빈국’이다. 전통적 에너지 자원의 글로벌 편재성을 극복하고,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패러다임에 맞춰 수소를 국가 경제 생존전략으로 선택했지만, 마주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잠재적 청정수소 수요는 막대하나 그에 필요한 생산 기술은 상업화에 다다르지 못했고 가격은 전통 연료에 비해 턱없이 높다. 국외에서 대규모로 공급하겠다는 희망자는 있지만 국내에는 안정적 도입 시설을 갖춘 대량 수요자가 없다. 

이렇게 시장이 형성되지 않으니 기술 상업화는 요원하고, 사방에서 보조금을 달라는 이야기만 들린다. 한마디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딜레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수소차 85만 대 보급, 수소발전 8GW 달성이라는 야심 찬 목표를 제시했지만, kg당 6,000원을 넘는 수소 가격과 턱없이 부족한 충전 인프라 앞에서 수소차 이용자나 공급자 모두가 운동장에 활기차게 뛰어들지 못한 채 관망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기준가격제(BM; Benchmark) 도입을 제안한다. 

지불의향 가격을 통한 BM가격제 제안

기준가격제는 정부가 산업용, 발전용, 수송용 등 용도별로 차등화된 가격 신호를 제시함으로써 투자와 유통, 수요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도록 유도하는 시장 조성 전략이다. 이 제도는 수소경제의 진행 방향과 속도를 제어하는 ‘교통신호등’이자 ‘시장설계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 

우선, 수소의 용도별로 ‘지불의향 가격(WTP; Willingness to Pay)’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지불의향 가격이란, 소비자가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 스스로 지불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최대 금액을 뜻한다. 예를 들어, 같은 무게의 바나나라도 생산지인 필리핀에서는 500원, 수입되는 한국에서는 1,500원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다면, 두 나라의 지불의향 가격은 서로 다른 것이다.

수소 역시 마찬가지로 철강산업, 발전소, 수소차 등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소비자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부문별 WTP 분석이 꼭 필요하다. 

한국에서 수소 1kg을 구입하기 위해 소비자가 기꺼이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최고 금액, 즉 지불의향 가격(WTP)은 용도별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인공지능을 통해 조사한 결과, 산업용 수소의 WTP는 대체연료인 천연가스 가격을 고려하여 약 3,500원/kg, 발전용은 전력시장 SMP와 연계하여 약 3,000원/kg, 수송용은 휘발유 대비 경제성 확보 차원에서 4,000원/kg 수준이 적절하다는 대답을 얻었다. 

한국형 BM가격제도는 명확한 단계와 최종 출구전략을 갖추어야 한다. 첫 단계에는 BM가격과 차액보전계약(CfD; Contract for Difference)을 통한 시장 안정화,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입찰경쟁 기반 시장으로의 전환, 최종 단계에서는 수소거래소 중심의 자율시장 완성이라는 3단계 로드맵을 상정할 수 있다.

BM가격제가 제공하는 예측 가능한 수익성은 대규모 투자를 유도하고, 이는 다음과 같은 선순환 구조를 만든다. 첫째, 대량 생산과 대량 유통을 통한 단가 하락을 유인한다. 둘째, 안정적 시장 전망 하에서 상업화를 위한 대규모 R&D 투자를 유인한다. 셋째,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글로벌 공급자 간의 경쟁을 심화시켜 수소 생산설비의 효율성 개선을 촉진할 수 있다. 

하지만 BM가격제의 성공을 위해서는 몇 가지 불확실성 요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첫째, 지정학적 리스크나 공급망 차질로 인한 급격한 가격 변동에 대응할 수 있는 조정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둘째, 그린수소 생산비용이 예상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하락할 경우 현재의 BM가격이 과도하게 또는 과소하게 보조가 될 수 있으므로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셋째, 기술 중립적 접근과 주기적 재평가 체계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장기 프로젝트인 수소경제와 5년 단위의 정치 사이클 간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초당적 합의와 법제화를 통한 정책 안정성 확보가 중요하다.

최근 유럽연합은 유럽수소은행(European Hydrogen Bank)을 통해 CfD 방식의 입찰을 통해 저탄소 수소 공급자를 선정하고 있으며 독일, 네덜란드 등도 시장 기반 지원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한국 BM가격제 도입에 관한 이 제안은 수소 생태계의 구조적 전환을 유도하는 시장설계 방식이라는 점에서, 기술 상업화와 국제 경쟁력 확보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전략적 해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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