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블룸에너지와 대규모 슈퍼커패시터 공급계약
에스, 범한퓨얼셀, DMI 등 대표 3사에 MEA 납품
탄소기술원 세워 ‘탄소 지지체’ 개발에 집중
美 PEM 수전해 시장 진출 타진
같은 모양의 공장이 또 하나 들어섰다. 2공장에 해당하는 파워솔루션동은 작년 7월에 준공이 됐다. 50여 미터 앞에 1공장에 해당하는 연료전지동이 데칼코마니로 놓여 있다.
“회사의 양대 축이 슈퍼커패시터와 수소연료전지입니다. 2005년부터 생산한 슈퍼커패시터가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수소연료전지 사업을 성장시킨 밑거름이 됐죠.”
지난 5월 비나텍은 고체산화물 연료전지(SOFC) 전문기업인 미국의 블룸에너지와 대규모 슈퍼커패시터 공급계약을 맺으면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다.
AI 산업의 성장으로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발하면서 전력공급원으로 SOFC 기술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추석 연휴를 지나며 100달러 넘게 급등한 블룸에너지의 주가가 이를 반영한다.
“슈퍼커패시터는 리튬이온배터리보다 충방전 속도가 100배 이상 빠르고 충방전 수명도 수십만 회를 넘기 때문에 데이터센터의 피크 전력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데 유용하다”는 것이 수소연료전지사업부 정한기 사장의 말이다.
국내 건물용 연료전지 시장 석권
말이 나온 김에 파워솔루션동을 먼저 돌아본다. 슈퍼커패시터도 VPC, VEC, VET 등 종류가 많다. 사각 파우치 모양의 ‘하이브리드 리튬이온커패시터(LIC)’도 있고, 커다란 원통 건전지 모양의 EDLC 제품도 있다.
비나텍은 베트남에 생산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베트남 현지에 부지를 새로 확보해 세 곳에 흩어진 공장을 한 곳으로 모으는 작업을 추진 중이다.
“2공장은 중대형 슈퍼커패시터와 모듈 생산에 주력하고 있죠. 이곳 완주테크노밸리에 총 4개의 공장이 들어설 예정입니다. 투트랙 전략에 따라 시장의 수요를 보고 수소연료전지동을 먼저 지을지, 파워솔루션동을 추가로 지을지 결정을 해야죠.”
한국전력과 함께 실증 과제로 개발한 1MW급 주파수조정용(FR) 슈퍼커패시터도 눈에 띈다. 하이브리드 ESS 시스템에 적용되는 장비로 충방전 횟수는 50만 회가 넘는다. 배터리와 연계해 수명을 크게 늘리면서 전기의 품질을 높일 수 있다.
“LIC는 리튬이온배터리(음극)와 슈퍼캡(양극)을 한 셀 안에 하이브리드로 구현한 제품이죠. 아직 개발이 더 필요해요. 이런 신제품을 국내에서 개발하고 기술이 안정화되면 베트남 공장에 라인을 구축하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기존 ESS 배터리가 에너지 저장 중심이었다면, 슈퍼커패시터는 전력망(계통)에서 요구되는 주파수 조정에 대응할 수 있다. 정한기 사장은 “배터리는 에너지 디바이스, 슈퍼캡은 출력 디바이스”라며 “에너지 충방전에 빠르게 대응하는 슈퍼캡의 기술력이 오르면서 ESS 시장에 새로운 해법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재명 정부는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력계통 안정성 유지 측면에서도 슈퍼커패시터를 활용한 하이브리드 ESS의 수요 확대를 예상할 수 있다. 비나텍은 단순히 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모듈화한 시스템 제품으로 부가가치를 높여가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비나텍은 연료전지 분야에서도 남다른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9월 두산모빌리티이노베이션(DMI)과 건물용 수소연료전지에 들어가는 막전극접합체(MEA) 공급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에스퓨얼셀, 범한퓨얼셀을 아우르는 국내 대표 연료전지 3사에 MEA를 공급하는 회사가 됐다.
“연료전지 핵심 소재이자 부품인 지지체, 촉매를 비롯해 MEA를 일괄 생산하는 기업으로는 글로벌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죠. 이 점에 큰 자부심이 있어요. 국내 PEM(고분자전해질) 연료전지 업체들이 비나텍 제품을 쓰게 되면서 공급망 안정화, 생산단가 인하에 기여할 수 있게 됐죠.”
다만 국내 건물용 연료전지 시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건설 경기가 침체되고, 공공기관이나 민간건축물을 대상으로 한 의무화 시장이 축소되면서 PEM 연료전지 회사들이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또 정부가 추진 중인 제로에너지건축물(ZEB) 정책에서도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정한기 사장은 “시장이 차갑게 얼어붙으면서 힘들어하는 곳이 많다”라며 “경제성 논리로만 접근하지 말고, 파급 효과가 큰 부품산업이 제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건물용 연료전지 시장에 힘이 실렸으면 한다”고 제언한다.
탄소기술원 통해 ‘탄소 지지체’ 개발에 집중
비나텍은 세계 최초로 ‘지지체-촉매-MEA’로 이뤄진 연료전지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이중에서 가장 주목할 소재가 카본 지지체다. 지지체는 씨앗이 떨어져 자라는 땅에 비유할 수 있다. 땅심이 약하면 씨앗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카본 지지체에 땀구멍 같은 기공(pore)이 있고, 이 구멍 안에 백금 촉매가 쏙쏙 박혀 있다고 할 수 있죠. 어떤 지지체를 쓰느냐에 따라 촉매와 MEA 단계의 성능이 확 달라질 정도로 중요한 원소재입니다. 매출의 기여도는 낮지만, 연료전지 퍼포먼스(성능)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절대적이기 때문에 지지체를 컨트롤하는 기술이 매우 중요해요.”
비나텍의 역사는 카본(Carbon), 즉 탄소 입자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은 사내에 설립한 탄소기술원이 그 전통을 잇고 있다.
“올해 7월에 비나탄소기술원을 세우면서 탄소 분야의 세계적인 석학인 큐슈대학의 윤성호 교수님을 원장으로 모셨어요. 연료전지의 성능과 내구에 큰 역할을 하는 탄소 담지체 기술 개발을 이곳에서 주도하고 있죠.”
탄소기술원은 2~20나노미터 사이의 크기에 해당하는 기공이 있는 메조포러스(Mesoporous) 지지체, 탄소 나노 드릴링 기술, 탄소나노섬유 개발 등을 진행한다. 이는 난이도가 매우 높은 기술이다.
탄소 입자에 난 기공의 크기에 따라 마이크로(Micro, 2nm 이하)·메조(Meso)·매크로(Macro, 20nm 이상) 포러스로 구분한다.
연료전지 전극 촉매와 관련이 큰 메조포러스 지지체 개발을 위해서는 기공의 크기와 분포도뿐 아니라 기공 입구의 크기와 굴절도, 내부 채널의 연결성, 기공 내외부 백금 촉매의 비율, 이오노머 분포 등 수많은 변수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비나텍은 이 분야에 뛰어난 기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슈퍼커패시터의 음극, 양극에도 다공성 활성탄소가 활용되는 만큼 탄소기술원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는 차세대 카본 연구는 회사 성장의 핵심 기반이 된다.
비나텍은 올해 산업통상자원부에서 주관하는 ‘소재부품장비 으뜸기업’에 선정이 됐다. 이와 관련해 ‘메조포러스 탄소 지지체(MPC) 기반 고내구 연료전지 막전극접합체 생산기술 개발’이라는 과제를 기획해 준비하고 있다. 또 국내외 전문업체, 국책 연구기관, 대학 등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그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PEM 수전해 시장이다. 비나텍은 과거 약 20년 동안 연료전지용 MEA를 개발하고 생산한 노하우를 활용해서 1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국내외 업체에 수전해용 MEA 샘플을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이리듐 전극 제조를 위한 레시피 개발, 고가의 원소재 사양 선별을 통해 메이저 고객사에서 요구하는 60℃ 저온 조건에서 수전해 성능이나 수소 크로스오버 특성을 개선한 샘플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왔어요. 또 30bar 이상의 캐소드·애노드 차압 조건에서 장시간 내구 시험을 병행해서 우리 제품의 뛰어난 점을 부각할 생각입니다.”
PEM 수전해로 미국 시장 진출 타진
비나텍은 연료전지동에 MEA 양산을 위한 자동화 설비를 잘 갖추고 있다. PEM 수전해용 MEA도 생산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대면적 수전해 MEA 생산에 기존 전극 코팅 장비, 전사 장비 등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정한기 사장은 “회사가 보유한 글로벌 영업망을 통해 국내외 수전해 업체에 MEA 샘플을 공급해서 피드백을 받고 있다”라며 “주마다 영상회의나 대면 미팅을 통해 기술 개발 방향을 논의하면서 긴밀히 협업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통해 내년부터 수전해 부문에서도 의미 있는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이전까지 유럽 시장 중심이었다면, 올해는 미국 시장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고 조사를 해보니 수전해가 7, 연료전지가 3 정도로 수전해 사업 비중이 훨씬 높게 나왔어요. PEM 연료전지와 수전해는 생산공정의 80%가 겹쳐요. 우리만의 장점을 살려서 효과적으로 자원을 투입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판단으로 이번에 영업 조직도 새로 꾸렸습니다.”
시장이 작은 국내에서 1, 2등을 다투는 건 의미가 없다고 본다. 해외 프로젝트로 MEA 납품 승인을 받으면 그 자체로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지미 팰런쇼에 등장해 라이브로 ‘골든’을 부른 이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글로벌 인기 덕분에 한국에서 싱글 앨범을 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유럽 시장에 소홀한 건 아니다. 비나텍은 올해 초 독일의 항공기 엔진업체인 MTU Aero Engines(이하 MTU)와 ‘항공기용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개발을 위한 MEA 공급계약’을 맺었다.
뮌헨에 본사를 둔 MTU는 1934년 BMW에서 분사되면서 설립된 항공기 엔진 제조사로 롤스로이스, 피아트아비오 등과 손을 잡고 엔진을 개발해왔다.
“작년 6월 베를린에서 열린 항공우주박람회(ILA Berlin Air Show)에서 MTU가 항공용 연료전지 시스템 개발을 위한 주요 파트너사로 비나텍을 선정했어요. 성도경 대표님과 현장을 찾아 바나비 로우(Barnaby Law) 수석엔지니어를 만나기도 했죠.”
MTU는 탄소중립 시대를 앞두고 항공기용 전기 파워트레인을 개발하는 ‘FFC(Flying Fuel Cell)’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바나비 로우는 이 팀을 이끌고 있는 수장이다.
MTU는 2027년까지 600kW급 항공용 수소연료전지 시스템 개발을 목표로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MEA를 비나텍과 함께 개발하게 된다.
“연구개발에 드는 억대의 비용을 MTU에서 전액 부담하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어요. 향후 매년 130대의 수소연료전지 항공기를 제작하는 FFC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면 연간 수천억 원 규모의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죠.”
항공용 추진시스템으로 연료전지가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비행기 이착륙 시 방열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출력, 고내구의 MEA가 필요하다. 비나텍은 100℃ 이상의 고온·저가습 조건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업체도 달성하지 못한 공격적인 목표를 설정해두고 있다.
국내를 포함해 유럽,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가면서 PEM 연료전지, 수전해 분야에서 MEA 개발사이자 제조사로 명성을 다지겠다는 것이 비나텍의 전략이다. 이곳 완주테크노밸리에 수소연료전지동이 먼저 들어설지, 파워솔루션동이 먼저 들어설지 자못 기대가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