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여수에 있는 여천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달린다. 정거장에 내려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노란색 구조물이 보인다. 그 구조물엔 여수국가산업단지(이하 여수국가산단) 표지가 붙어 있다.
길을 건너니 여러 건물이 모여 있다. 이곳은 지난 2019년 6월에 조성된 ‘여수미래혁신지구’다. 여수미래혁신지구는 여수국가산단과 연계한 연구기관과 지원기관의 집적화 산업단지로, 한국건설생활환경시험연구원을 비롯해 전남대 여수산학융합캠퍼스, 전남여수산학융합원, 한국산업단지공단, 한국화학연구원 등이 입주해 있다.
한국화학연구원(이하 화학연)은 여수미래혁신지구에서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는 촉매, 탄소포집활용(CCU) 등 석유화학산업에서 활용할 탄소중립기술 개발을 지원하는 플랫폼이다.
전남도의 주력산업인 석유화학산업과 철강산업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양은 전남도 전체 온실가스 배출량의 81%를 차지한다. 특히 석유화학산업단지인 여수국가산단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양은 국내 석유화학산업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양의 45%를 차지한다.
2030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달성하고 2050년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해선 공정 개선, 탄소 저감형 기술개발, 탄소중립 혁신산업 전환 등을 통해 석유화학산업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양을 줄여야 한다.
그 일환으로 기업들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저감할 수 있는 친환경·저탄소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실증시설 및 체계가 매우 부족한 데다 기업으로선 설비 구축과 전문 인력 확보를 위한 재원과 시간을 마련하기가 어려워 실증 단계를 넘지 못하고 사장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한중진 화학연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장은 “보통 실증장비의 크기가 기업 연구소에서 다루는 장비보다 10~100배 이상 커 실증장비를 설치할 장소를 구하기가 어렵고 설치비용만 수십억 원이 든다. 여기에 실증에 필요한 인원과 비용을 투입해야 하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며 “무엇보다 실증을 통해 기술을 상용화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상용화에 실패하면 기회비용으로 날아가기 때문에 실증을 꺼리게 된다. 그래서 10개의 원천기술이 개발되면 1개 정도만 상용화된다”고 설명했다.
전라남도, 여수시, 화학연은 여수산단과 광양산단을 탄소중립형 화학기술 상용화 거점으로 육성하기로 하고 지난 2021년 10월 화학연 전남 조직 설립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와 함께 ‘석유화학산업 고도화를 위한 실증규모 촉매 제조 테스트베드 구축사업’과 ‘탄소포집활용 실증지원센터 구축사업’을 공모, 국책과제로 선정됐다.
두 사업은 1년 차이를 두고 진행되고 있다.
‘석유화학산업 고도화를 위한 실증 규모 촉매 제조 테스트베드 구축’ 사업은 지난 2021년에 착수, 2023년 12월 ‘촉매공정 실증 플랫폼’을 구축하고 지난해부터 운영하고 있다.
이 플랫폼은 연구지원동과 실증실험동으로 구성됐다. 화학연은 올해까지 총사업비 283억 원(국비 100억 원, 지방비 183억 원)을 투입해 해당 사업을 완수한다.
‘탄소포집활용 실증지원센터 구축 사업’은 지난 2022년에 착수, 지난해 12월 탄소포집활용 실증 플랫폼을 구축하고 지난 5월부터 운영하고 있다.
이 플랫폼도 연구지원동과 실증실험동으로 구성됐다. 화학연은 오는 2026년까지 총사업비 280억 원(국비 100억 원, 지방비 180억 원)을 투입해 해당 사업을 완수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화학연은 여수미래혁신지구에 탄소중립기술을 실증할 수 있는 국내 유일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를 구축했다.

촉매 제조기술 실증
한중진 센터장을 따라 탄소포집활용 연구지원동을 나와 옆에 있는 석유화학 촉매공정 실증실험동으로 이동한다.
이곳은 석유화학 및 환경 분야 등 촉매 소재 스케일업 및 성형 기술을 실증한다.
실증실험동 내 킬로랩 구역으로 들어가니 여러 장비가 보인다. 이 장비들은 정밀 화학제품을 벤치 규모(엔지니어링 설계를 위한 변수를 정하고자 하는 실험)로 다양한 유기합성 반응을 수행할 수 있는 반응기로, 20L, 50L, 100L, 300L 등 총 10여 대가 설치돼 있다.
반응기를 지나 촉매와 분리소재를 실증할 수 있는 실증실험동으로 들어가니 2단 규모의 장비가 보인다. 이 장비는 촉매 제조 실증 장비로, 슬러리혼합기 2대와 결정화기 2대로 구성됐다.
슬러리혼합기는 습식 공정을 이용한 촉매를 제조하거나 촉매 성형 전 슬러리액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슬러리(액체에 고체가 부유해 혼합된 상태)의 고형물 침강(외부 힘으로 고형물이 액체에서 가라앉는 현상)에 대한 균일도 유지, 대량 슬러리의 분산도 개선 및 최적 분산에 활용할 수 있는 장비다.
결정화기는 고온·고압에서 수용액을 이용해 물질을 합성하는 수열합성법으로 전구체 물질들의 결합, 핵형성 및 결정화를 유도해 제올라이트나 화학소재를 제조하는 장비다.
한중진 센터장은 “합성 촉매엔 수분이나 용매가 많이 들어 있다. 그래서 촉매 제조 실증 장비 옆에 있는 필터프레스라는 장비로 수분이나 용매를 짜내어 제거한다. 촉매를 성형하기 위해 필터프레스 장비에서 회수한 반건조 샘플과 다양한 유·무기 바인더를 혼합한 뒤 소재 특성에 맞는 성형 장비를 활용해 성형 촉매 소재를 얻는다”라고 설명했다.

분무건조기는 액상, 에멀전(수분과 유분이 섞인 물질) 등에 포함된 슬러리를 건조해 분말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장비로, 높이가 최대 16m에 달해 3층 규모로 설치됐으며 고온의 공기를 주입하기 위한 가스버너와 소재를 건조하고 회수하기 위한 주건조챔버, 싸이클론, 백필터 등으로 구성됐다.
분무건조기는 슬러리를 회전디스크로 분무해 미세 물방울을 열풍기류 속에 접촉시켜 순간적으로 수분이나 유기용매를 증발·건조시켜 분말 형태의 구형 생성물을 만든다. 생성물은 배관을 따라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보관용기에 담긴다.
또한 ‘쌍원뿔형 여과건조기’는 원뿔 형태의 용기 내부에서 물질을 회전하면서 건조시키는 것으로, 표면온도, 회전속도 등을 조절해 짧은 시간에 제품을 건조할 수 있다. 진공 상태에서 작동해 열에 민감한 물질이나 용매 회수가 필요한 경우에도 효과적으로 건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촉매 내 수분 함량을 5% 이내로 건조할 수 있다. 또 촉매 반응의 활성상으로 작용하는 금속류의 활성성분을 지지체에 코팅할 때 이 장비를 활용할 수 있다.
이 밖에 촉매 및 소재를 고온에서 건조·소성하고 화학제품을 열처리하는 소성로, 마이크로 크기로 분쇄하는 미세분쇄기, 단면 형상이 일정한 성형체를 생산하는 압출기 등도 있다.
이러한 장비들로 촉매 및 소재를 정밀하게 가공해 촉매와 소재의 상태, 성능, 내구성 등을 검증하고 관련 원천기술을 고도화해 상용화할 수 있다. 또 촉매 개발업체뿐만 아니라 배터리 소재 개발업체도 해당 장비들을 활용할 수 있다.
한중진 센터장은 “이차전지에 들어가는 양극재와 음극재가 분말 형태의 고체로 제조되는 만큼 배터리 소재 개발업체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한 업체는 자체 개발한 원천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화연 장비를 활용해 실증하기도 했다.
그래서 촉매뿐만 아니라 배터리 소재 등으로 영역을 넓힐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산화탄소 활용 공정 실증

석유화학 촉매공정 실증실험동을 나와 옆에 있는 또 다른 실증실험동으로 이동한다.
이곳은 지난 5월에 준공된 ‘탄소포집활용 실증실험동’으로, 이산화탄소 전환 화학원료 제조 기술, 이산화탄소 활용 e-메탄올 및 e-퓨얼 제조 기술, 무탄소 에너지 전환 기술 등을 실증한다.
실증실험동 안으로 들어가니 길쭉한 모양의 설비가 눈에 들어온다. 이 장비는 이산화탄소 가스를 합성가스로 만드는 소재, 촉매, 부대장치를 평가하는 장비인 ‘이산화탄소 기상 전환 설비’다.
이 장비는 고온(600~1,000°C) 고압(최대 9bar)의 환경에서 건식(CO₂), 습식(H₂O), 복합(CO₂+H₂O) 등 다양한 개질 반응을 통해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와 메탄을 합성가스인 일산화탄소와 수소로 만들어 촉매의 성능과 내구성을 평가한다. 하루에 처리할 수 있는 이산화탄소량은 150kg이다.
그 옆에는 ‘이산화탄소 고압 액상 전환 설비’가 설치됐다.
이 장비는 이산화탄소를 고압 액상 반응을 통해 다양한 액체 탄화수소를 생산하고 생산설비의 구축 및 반응 안전성 검토, 공정 상용화를 위한 실증 데이터 수집 등 연구 개발에 활용하는 장비다. 글리세롤과 같은 이산화탄소 환원제로 탈수소화 반응을 통해 젖산과 같은 유기산, 고분자를 생산하고 실증한다. 하루에 23kg의 이산화탄소를 처리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 고압 액상 전환 설비를 지나니 또 다른 길쭉한 모양의 장비가 등장한다. 이 장비는 앞선 본 이산화탄소 기상 전환 설비와 높이는 비슷하나 두 개의 장치가 적용됐다. 이 장비의 이름은 ‘이산화탄소 전환 액상 화합물 제조 설비’다.
이 장비는 이산화탄소 액상 전환 실증용 평가설비로, 고온·고압의 환경에서 이산화탄소 직접전환반응을 통해 메탄올을 합성하거나 이산화탄소 기상 전환 설비로 만든 합성가스를 피셔-트롭시 반응을 통해 액체 탄화수소 연료 및 원료를 생산하고 실증을 통해 반응열 제어 등 다양한 스케일업 데이터를 확보해 상용화를 촉진한다. 이 실증 장비로 하루에 50kg의 합성연료를 생산할 수 있다.
한중진 센터장은 “두 개의 장비는 압력이 다르다. 왼쪽 장비는 80bar, 오른쪽 장비는 30bar 정도 된다. 메탄올을 합성할 때 압력이 80bar 수준으로 높아야 한다. 반면 납사, 수소연료를 만들 땐 압력이 높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압력이 다른 두 개의 장비를 설치한 것”이라며 “특히 기업이 자체 개발한 장치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해당 장비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올 하반기부터 한 기업과 이산화탄소 전환 액상 화합물 제조 설비를 활용해 메탄올 생산 기술을 실증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다양한 저탄소·친환경 연료 생산 기술의 실증 프로젝트가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며 “또 현재 추진되고 있는 CCU 메가프로젝트 일환으로 SAF 실증 연구도 해당 장비를 통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덧붙였다.
CCU 메가프로젝트는 이산화탄소 공급부터 제품 활용까지 CCU 전주기 실증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이산화탄소 다배출 산업과 연계한 대형 R&D 프로젝트를 실증하는 사업이다.
주관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10월 프로젝트를 추진할 부지 5곳을 선정했는데 여수국가산단에 있는 GS칼텍스 2공장이 포함됐다.
GS칼텍스는 정유화학공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기초화학물질인 올레핀, 나프타, 폴리올 등으로 전환하는 공정을 실증할 계획이다.
실증은 화학연과 협력해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에서 이뤄질 예정이다. 그 일환으로 지난해 4월 GS칼텍스와 화학연은 관련 업무협약을 체결한 바 있다.

탄소중립기술 실증 수행
화학연 탄소중립화학공정실증센터는 탄소중립기술의 실증 연구를 전담하는 전문 조직인 만큼 다양한 탄소중립기술의 실증을 기획·수행하고 있다.
특히 부생가스의 화학 원료 전환을 위한 파일럿 규모의 설비 구축 및 실증 연구와 촉매, 분리막, 탄소포집활용 등 화학연이 보유한 탄소중립 원천기술에 관한 실증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또 센터는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다양한 분야에서 개발 중인 원천기술의 실증 연구와 사업화를 지원하고자 추가 실증부지를 기반으로 실증 협력 연구를 수행하고자 기업체들과 논의하고 있다.
한중진 센터장은 “탄소중립 실증 연구를 통해 상용화 가능성이 큰 화학공정기술을 발굴·확산하고 국내 석유화학산업의 위기 극복과 지속가능한 산업 전환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