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항 영일만항의 콘크리트 방파제에 서서 바닷바람을 맞는다.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야”를 콧노래로 흥얼거리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다. 서핑의 명소인 용한리 해수욕장이 코앞이다. 바람을 탄 너울이 흰 포말을 뱉으며 쉼 없이 밀려든다.
여기서 멀지 않다. 해안도로를 타고 칠포해수욕장 쪽으로 몇 분을 달리다 보면 길 왼쪽에 영일만 일반산단 표지가 나온다. 이날 목적지인 플랜텍 신항만 제작공장을 찾아가는 길이다.
현장의 충전 수요 위한 모듈형 패키지
공장동 앞에 ‘수소 PRG 시스템’이란 간판을 단 40피트 컨테이너가 놓여 있다. PRG는 수소의 생산(Production)부터 충전(Refueling), 발전(Generation)까지 그 기능을 하나로 통합한 올인원 모듈 시스템을 말한다.

“수소 PRG 시스템의 핵심 구성요소 중 하나인 R모듈입니다. 앞단에 수소생산 설비나 수소배관을 연결하거나 튜브트레일러를 붙여 수소를 충전하게 되죠. 지난 2022년 회사 조직을 개편하면서 플랜트사업실 안에 수소사업그룹을 만들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착수한 사업 아이템이라 할 수 있죠.”
민영위 플랜트사업실장의 말이다.
R모듈은 수소충전소 설비동과 디스펜서를 하나의 컨테이너에 모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디스펜서의 경우 집 안에 냉장고를 들이듯 기성품을 넣은 게 아니라 설계를 따로 해서 맞춤형으로 새롭게 꾸몄다.
R모듈 바로 옆에 질소발생기와 냉각기가 보인다. 그 옆에 나란히 놓인 파란 컨테이너박스는 사무동과 전기실이다.
앞단에 튜브트레일러만 연결하면 바로 수소를 충전할 수 있는 패키지형 충전소라 할 수 있다. 플랜텍의 R모듈은 시간당 600N㎥, 즉 50kg 정도의 수소를 충전할 수 있다. 승용은 시간당 12대, 상용은 시간당 2대를 충전할 수 있다.
“수소를 필요로 하는 현장에서 직접 수소를 생산해 수소전기차, 지게차 같은 모빌리티를 충전하고, 연료전지시스템을 연결해 전력을 생산해서 전기차에 충전하거나 한전에 판매해서 부가수익을 올리는 모델로 처음에 기획이 됐죠.”
플랜텍은 2년 전만 해도 ‘포스코플랜텍’으로 불렸다. 직원들이 입고 있는 형광색 조끼에도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명을 바꾼 뒤로 포스코의 영향력을 조금씩 줄여가고는 있지만, 포항제철과 광양제철을 중심으로 한 철강, 물류, 환경·에너지 사업이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포스코는 지난 2020년 연말에 “2050년까지 수소생산 500만 톤 체제를 구축하고 수소사업에서 매출 30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미래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다. 또 이듬해에는 현대차와 수소사업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양사는 수소에너지 활용 기술을 개발하고, 제철소 내 운영차량을 수소전기차로 전환하기로 뜻을 모았다. 포스코는 그 후로도 고로공정 개선, HyREX 수소환원제철 기술개발에 나서기로 하는 등 수소사업에 의지를 내비쳤다.
“포스코의 미래 전략에 맞춰서 수소사업센터를 열고 수소 PRG 시스템 개발에 나섰다고 할 수 있어요. 포항과 광양 제철소에서 운용 중인 차량만 1,500여 대에 이르고, 지게차나 굴착기 같은 건설기계를 더하면 그 수가 몇 배는 되죠. 이렇게 단계적으로 수소전기차로 전환이 되면서 충전 수요가 급증할 걸로 봤어요.”
지금도 포항제철소 안에는 수소충전소가 없다. 충전을 하려면 코하이젠에서 운영하는 포항장흥 충전소까지 7km는 달려야 한다. 광양제철소만 해도 부지면적이 가로 6km, 세로 4km에 이른다.
“수소지게차를 운용하려면 제철소 부지 안에 최소 면적으로 패키지형 충전소를 넣는 게 최선입니다. 현대제철도 그렇고 제철소 안에 수소배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요. 모듈형 패키지 충전시스템을 출시하면 수요가 있다고 봤죠.”
이런 계획들이 일정대로 추진이 됐더라면 패키지형 수소충전소 시장이 당초 기대처럼 빠르게 열렸을 것이다.
부지면적 20% 축소, 공기 2개월 단축
사무동에 들러 각종 설비와 기계장치를 제어하는 통신 프로그램인 HMI(Human Machine Interface) 화면을 살펴본다. 디자인이 깔끔하다. 충전 현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제어하는 소프트웨어도 잘 갖추고 있다.

플랜트사업실의 전승훈 차장은 “수소충전 현장에서 겪을 법한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을 설계 단계에 모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라며 “담당자가 온라인상에서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바로 옆 전기실을 잠깐 둘러보고 R모듈에 해당하는 설비동으로 향한다. 40피트 컨테이너의 크기는 가로 12m, 너비 3.2m, 높이는 3.4m다. 가로 길이를 빼면, 너비와 높이는 일반 컨테이너보다 50cm가량 큰 편이다. 컨테이너 위로 피뢰침처럼 비쭉 튀어온 두 개의 관은 특허를 받은 자동배기시스템이다.

유지보수를 위한 미닫이문이 곳곳에 달려 있다. 맨 왼쪽에 한국유수압의 왕복동 피스톤 압축기가 들어 있고, 중앙에는 파버사의 고압·중압 저장용기가 나란히 놓여 있다. 저장용기 옆에 우선순위제어 패널이 붙어 있고, 칸막이 반대쪽에는 디캔트(Decant) 패널과 디스펜서 패널이 붙어 있다.
디캔트 패널은 튜브트레일러와 연결해 수소기체를 압축기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칸막이에 6mm 두께의 금속 방호벽을 적용했다.

이곳을 빼면 내부는 모두 트여 있다. 수소가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천장에는 가로로 긴 환기구가 나 있다. 방폭을 적용한 환기팬으로 상시 환기가 가능하고, 가스 누출이나 화재 발생 시 자동으로 배기시스템이 작동하도록 구성했다. 또 수소 누출, 화재 여부를 감지하는 감지기가 곳곳에 설치돼 있다.

왕복동 압축기용 유압모터 베이스에 진동센서를 달아 고장 여부를 미리 진단할 수 있게 한 점도 돋보인다. 예지정비를 위해 반영한 기술이다. 안전을 위한 방폭 설비를 꼼꼼하게 갖추고 있고, 상시 정비와 모니터링을 위한 내부 동선 확보도 잘돼 있다.

“기존 충전소와 비교해서 부지면적을 20% 정도 줄일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죠. 공사기간도 짧아요. 설계부터 시운전까지 표준 일정이 8개월 정도 걸린다면 R모듈은 두 달의 공기를 단축할 수 있죠. 공장에서 패키지를 미리 만들어두고 현장으로 옮기기만 하면 됩니다. 토목공사 후 현장 설치는 채 한 달이 안 걸려요.”
플랜텍은 시장의 수요를 고려해 R모듈을 우선 개발했다. 다만 온사이트형 충전소로 가려면 R모듈 전단에 수소추출기인 P모듈이 필요하다.
전승훈 차장은 “원일티엔아이나 현대로템, 제이엔케이글로벌 같은 회사에서 이미 SMR(스팀메탄개질) 방식의 수소추출기를 출시했다”라며 “새 제품을 개발해 경쟁하기보다는 기존 제품을 R모듈에 연결하는 형태로 P모듈을 개발 중”이라고 한다.
P모듈과의 연결에 필요한 기술적인 준비를 올해 연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플랜텍의 전주기 수소사업
플랜텍의 사업은 크게 철강, 물류, 환경·에너지 부문으로 나뉜다. LNG 탱크, 이차전지, 수소인프라 구축은 모두 환경·에너지 사업에 든다.
민영위 실장은 “플랜텍의 수소사업은 수소의 생산, 저장·운송, 수소 활용 부문에 모두 걸쳐 있다”고 강조한다. 수소생산만 해도 SMR, ATR(자열개질) 기술을 접목한 그레이수소뿐 아니라 블루수소, 청록수소, 수전해 사업을 아우른다.
청록수소는 1,000℃를 훌쩍 넘는 고온으로 메탄을 열분해해 수소와 고체탄소를 얻는 기술이다. 이 과정에 탄소가 발생하지 않아 탄소중립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 플랜텍은 청록수소 사업을 위해 지난해 11월 독일의 플라즈마 전문기업인 그라포체(Graforce)와 손을 잡았다.

“오스트리아에 건설한 실증 플랜트에서 시간당 200kg의 바이오메탄으로 50kg의 수소와 150kg 정도의 고체탄소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죠. 그라포체와 손을 잡고 포스코를 비롯한 국내 업체와 청록수소 사업을 준비하고 있어요. 플라즈마에 태양광 전력을 활용하면 탄소배출을 제로로 만들 수 있죠.”
수전해 사업은 중국 선그로우의 자회사인 선그로우 하이드로젠(Sungrow Hydrogen)과 협력하고 있다. 선그로우는 태양광 인버터 출하량 세계 1위 업체로 자회사를 통해 알칼라인, PEM 수전해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지난 3월에 선그로우 하이드로젠과 한국형 수전해 수소생산설비 공동개발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어요. PEM 수전해는 촉매에 들어가는 백금 때문에 아직 경제성 확보가 어렵다고 보고, 일단 안정적인 운용이 가능한 알칼라인으로 사업에 나설 생각입니다. 현재로선 2.5메가와트(MW) 스택을 기준으로 보고 있어요. 수전해 사업을 위한 수소제조 등록, 인허가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수소의 저장·운송 부문은 수소배관과 관련이 있다. 플랜텍은 2022년 11월부터 2023년 12월까지 포항제철소와 포스코스틸리온이 있는 철강공단을 잇는 길이 5km 구간에 수소배관을 깔았다.
울산, 안산 수소시범도시에도 설치된 200mm 대구경 수소배관 공사 실적을 기반으로 전국에서 추진 중인 수소도시 사업에 나서고 있다.
“수소 PRG 시스템은 편의상 수소 활용으로 분류하고 있어요. 차량 충전뿐 아니라 연료전지 발전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죠. 수소모듈, 수소충전시스템, 자동배기시스템의 특허출원을 마쳤고, 국제상표(H2 PRG SYSTEM) 등록도 완료했습니다. 한국환경공단의 인프라 협업 과제로 선정이 됐고 경북도, 포항시와 협력해서 실증사업에 나서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죠.”

국책과제로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과 함께 저질소산화물 연소기 개발도 진행하고 있다. 석탄을 코크스로 전환할 때 나오는 부산물인 코크오븐가스(COG)에는 다량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수소를 혼소(20%) 또는 전소용 연료로 활용하는 수소버너 기술을 개발 중이다.
“전주기 플랜트 사업의 관점에서 수소를 어떻게 생산해서 활용할지를 늘 고민해왔다고 할 수 있죠. 수소 PRG 시스템도 그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년 2월에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에서 녹색산업 글로벌 선도국가 도약을 위한 세부방안으로 바이오수소 생산시설 확대, 패키지 수소충전시스템 상용화 방안이 언급됐어요. 여기서 비용 등에 이점이 있는 PRG 시스템이 해결 방안으로 제시가 됐죠. 경북도와 포항시, 울진군이 수소충전소 구축에 관심이 많아요. 부지면적이나 제작 기간에 강점이 있는 R모듈이 수소충전 인프라 확대에 일조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올해 넥쏘 신차 출시를 계기로 수소전기차 보급이 5만 대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이 나온다. 이를 위해서는 수소충전소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
모듈러 공법을 채택한 맞춤형 주택이 늘고 있다. 수소충전소라고 다르지 않다. 플랜텍의 패키지형 R모듈 시스템을 원하는 현장이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