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스틸 인수를 추진하고 있는 일본제철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일본제철의 전신은 신닛테츠스미킨(신일철주금)이다. 신일본제철, 스미토모 금속공업의 합병으로 탄생한 거대 철강기업으로 2019년부터 ‘일본제철’이란 사명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으로 기억해요. 신닛테츠스미킨에 속한 스미토모금속에서 고압수소용 스테인리스강인 ‘HRX19’를 개발해서 시장에 출시했죠. ASTM(미국재료시험협회)의 XM19 원천기술을 참조해서 만든 오스테나이트계 스테인리스강으로, 수소충전소에 흔히 쓰는 STS316L 강재보다 인장강도가 두 배나 뛰어나고 수소취성에도 매우 강해요. 우리 회사는 바로 이 HRX19의 용접기술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용접기술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만하다. 하지만 HRX19를 용접 시공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HRX19 강재의 내식성과 내수소취성, 인장강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생각이 달라진다.
일본 본고압공업 통해 HRX19 용접기술 확보
㈜케이비테크(KB Tech)는 수원대학교 안에 있다. 지난해 5월에 설립된 스타트업으로 수원대 예비창업패키지에 선정이 되면서 창업보육센터에 입주해 있다.
“HRX19가 워낙 고가의 강재라 일본에서도 수소충전소 같은 곳에 한정적으로 들어가요. 강성이 높고 시공이 까다로워 일본에서도 극소수의 기업만 용접기술을 확보하고 있죠. 사이타마현에 있는 본고압공업이 수소충전소 고압가스 피팅 배관을 HRX19로 용접해서 시공하는 세계 유일의 회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장세환 대표가 테이블에 놓인 샘플 상자의 아크릴 덮개를 연다. 같은 용도로 쓰는 STS316L, HRX19 제품이 나란히 놓여 있다. 수소충전소에서 흔히 보는 STS316L 소재의 배관용 피팅에 밸브가 물려 있다.

“이쪽이 STS316L, 이쪽이 HRX19 제품입니다. 딱 봐도 316L 쪽이 열 배는 크다는 걸 알 수가 있죠. 들어보면 무게도 그만큼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배관의 내경은 HRX19 쪽이 더 커요. 강재의 인장강도가 높고 수소취성에도 강하기 때문에 이만큼 얇게 만들 수 있는 거죠.”

STS316L 엘보우와 티(Tee)의 무게가 각각 1.22kg, 1.61kg인데 반해 HRX19 엘보우와 티는 0.095kg, 0.12kg에 불과하다. 무게 비중이 8% 이하로 훨씬 가벼운 걸 알 수 있다.
장 대표가 일본제철의 HYDREXEL 안내 책자를 내민다.
HRX19가 강재를 부르는 말이라면, HYDREXEL은 상표명에 해당한다. 미국에서 XM19 강재가 AK스틸의 ‘Nitronic 50’이나 랭글리 알로이의 ‘Fermonic 50’이란 상표를 달고 시장에 팔리는 것과 같다.
“제가 작년에 열린 수소전시회(H₂ MEET)를 찬찬히 둘러봤어요. 그걸 보면서 수소업계에서 우리 회사가 해야 할 일이 참 많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압축기, 저장용기 할 것 없이 용접으로 가면 깔끔하게 해결될 부분을 대부분 락 피팅으로 갔더군요. 수소가 샐 만한 리크 포인트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죠.”
수소 분자가 워낙 작아 STS316L 재질의 나사로 피팅을 하면 진동이나 충격으로 체결 부위가 느슨해지면서 수소가스 누출이 쉽게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설의 유지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용접으로 가면 깔끔하게 해결된다. 크기와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장 대표의 설명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장 대표가 캘리퍼 게이지를 들고 기역(ㄱ)자로 꺾인 엘보우 튜빙 배관의 외경과 내경을 측정한다.
STS316L 제품의 외경은 14.3mm, 내경은 5.61mm다. HRX19 제품의 외경은 12.7mm, 내경은 7.31mm다. HRX19의 두께가 1.6mm나 얇다. 그런데도 내경은 1.7mm나 크다. 구멍이 크다는 건 관을 지나는 유체(수소기체)의 양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스테인리스강의 종류가 많아요. STS316만 해도 용접용 제품은 316L이 따로 나옵니다. L은 로우카본(Low Carbon)이란 뜻으로 탄소 함량이 0.03% 이하인 제품을 가리키죠. 저탄소라야 용접 후에 결정립 간 부식에 대한 저항력을 높일 수 있어요. 다만 STS316L은 파이프 살이 워낙 두꺼워 용접이 어려워요. 그래서 400바(bar) 이하의 압축 조건에서만 쓸 수 있죠. 그에 반해 HRX19는 두께가 절반 이하로 얇고, 700바 이상 초고압 환경에도 무리가 없어요. 또 90도로 꺾는 벤딩 작업이 가능해서 엘보우를 안 써도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 대표가 휴대폰을 꺼내 일본 현지 시공 사진을 보여준다. 탱크와 연결된 배관을 벤딩으로 처리해서 깔끔하게 이었다. 배관의 굵기가 작아 전체적으로 설비가 간결하고, 용접 부분도 큰 이질감이 없다. 관의 굵기가 가는 데도 내경이 넓어 더 많은 유체를 흘려보낼 수 있다.

오비탈 용접으로 800MPa 이상 인장강도 확보
HRX19 용접에는 ‘오비탈(Orbital) 용접기’라는 범용 장비를 쓴다. 용접 대상인 튜브를 고정한 상태에서 뾰족한 바늘에 해당하는 텅스텐 전극이 용접 헤드 안에서 원을 그리며 아크를 발생시킨다.

장세환 대표가 오비탈 용접기에 두 개의 관을 물리고 시연에 들어간다.
원래 배관과 배관 사이에 얇은 고리 모양의 보강재인 인서트(필러)를 끼우고 용접을 진행하지만, 인서트가 워낙 고가라 그냥 간다.
“헤드가 630도 회전하면서 자동으로 용접을 진행해요. 불활성가스인 아르곤을 이용해 산화를 방지하면서 고온의 아크로 용접부를 녹여 결합하게 되죠. 기술을 배우러 일본에 들어갈 땐 몇 주면 될 줄 알았는데, 이게 뜻대로 되지가 않더군요. 용접기술 자격증, 외관검사 자격증을 따는 데 8개월이 걸렸어요. 저 같은 전문가에게도 쉬운 기술이 아닙니다.”

아르곤가스는 정제를 한 뒤 혼합해서 써야 한다. 여기에도 많은 노하우가 들어 있다. 또 텅스텐 전극에 전류를 공급하는 펄스의 주파수, 헤드의 용접 속도를 정교하게 설정해야 한다. 튜빙 안으로 흘려보내는 가스의 공급량, 냉각 등 여러 변수를 제어해서 최적의 프로그래밍을 해야 고품질의 용접을 일관되게 수행할수 있다.

장 대표가 지난해 12월 13일 한국재료연구원(KIMS)에서 받은 인장강도 시험 기록지를 보여준다.
인장강도는 시험대상 시편을 양쪽에서 잡고 쭉 늘렸을때 끊어지기 직전까지 버틸 수 있는 힘으로, 재료의 내구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통상 메가파스칼(MPa) 단위로 표시하고, 1MPa은 1㎤당 10kg의 하중을 견딜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 시험에 활용한 제품이 테이블에 놓여 있다. 은색 파이프 쪽이 HRX19 튜브 원제품, 가운데 그을음이 묻은 쪽이 용접을 한 HRX19 튜브다.
“HRX19 튜브 원제품은 932MPa에서 끊어졌어요. STS316L의 인장강도가 500MPa 정도 되니까, HRX19가 두 배 정도의 강도를 확보하고 있는 셈이죠. 용접을 한 HRX19 튜브의 인장강도는 825MPa까지 나왔어요. 용접으로 800MPa 이상의 수치를 받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아파트 같은 건축물의 콘크리트 강도를 30MPa 이상으로 본다. 이와 비교하면 800MPa이 얼마나 높은 수치인지 알 수 있다.
HRX19 제품이 시장에 출시되고 나서 일본의 많은 회사들이 용접기술 확보에 매진했지만, 성공한 사례는 사이타마현에 있는 중소기업인 본고압공업이 유일하다고 한다.
“마츠다공업이란 회사가 용접기술 확보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수소충전소 현장에 시공한 사례는 없는 걸로 알아요. 그에 반해 본고압공업은 45개소가 넘는 시설에 용접 시공 실적이 있고, 지금도 시공을 이어가고 있죠. 본고압공업 회장님과 며칠 전에도 이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가장 오래된 현장이 11년 전에 시공한 도쿄의 센쥬충전소와 사이타마의 우라와충전소라고 하더군요. 이제까지 수소가스 누설 사례나 재시공 사례가 일절 없었고, 메인터넌스(유지보수) 한 번 안했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장 대표가 노트북을 열어 이메일을 보여준다. 장세환 대표에 대한 본고압공업의 신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케이비테크는 지난해 9월 본고압공업과 협약을 맺고 HRX19 튜브의 용접기술에 관한 통상실시권을 확보했다. 일본을 제외한 해외시장 진출 기회를 열어줄 만큼 케이비테크에 대한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KGS 코드 등록으로 국내 시공 가능
일본은 장인의 나라다. 기술에 대한 자부심, 신뢰가 있다. 장세환 대표의 풍모는 벤처기업, 스타트업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40년 넘는 세월을 기술자로 살아온 70대의 장인이다.
“제가 본고압공업에서만 11년을 근무했어요. 일본에서 소니, 히타치, 후지쯔 같은 반도체 회사의 현장 설비를 시공하면서 용접기술 장인으로 인정을 받았죠. 그러다 1995년에 귀국해서 한본이라는 회사를 세우고 20년을 경영했어요. 국내 반도체, 디스플레이 회사에 각종 장비와 부품을 납품하고, 유틸리티 배관설비를 시공하는 일을 했죠. 반도체 쪽도 가스를 많이 쓰니까요.”
중국과 싱가포르에 지사를 설립해 해외에 진출한 이력도 있다. 장 대표는 반도체 시장의 성장세가 기울자 수소 시장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본고압공업과의 오랜 인연도 새 도전에 큰 힘이 됐다.

“엔지니어의 시각에서 보면 겉보다 속이 중요해요. 소재가 얼마나 뛰어난지, 내구성이 얼마나 좋은지, 유지보수에 어려움은 없는지, 하는 것들이 정말 중요하죠. HRX19는 수소취성에 대한 저항성이 매우 강해요. 사람 몸도 혈관이 중요하잖아요. 안전하게 오래가는 수소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기본적으로 배관이 튼튼해야 합니다.”
장세환 대표는 줄곧 수소취성에 대해 강조한다. 금속의 미세공에 고압의 수소 분자가 파고들어 연성이 약해지면 금속이 부서지면서 수소가 누설될 수 있다.
일본제철의 HYDREXEL은 ASTM의 XM19 기준을 충족한다. 크롬(Cr) 22%, 니켈(Ni) 13%, 망간(Mn) 5%, 몰리브덴(Mo) 2% 정도가 들어 있다. 이 외에도 소량의 실리콘, 질소, 니오븀, 바나듐 등이 들어간다.
크롬, 망간의 첨가량을 최적화해서 고가의 니켈 함유량을 줄이면서 수소취성에 대한 저항성을 높인 것이 XM19 소재의 특징이다.
수소취성에 대한 저항성은 ‘니켈 당량(Ni equivalent)’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합금의 니켈 함량과 동등한 효과를 내는 다른 원소의 함량을 이르는 말로, HYDREXEL의 니켈 당량은 32.09~39.12%에 해당한다. 니켈 함량이 10%인 STS316보다 연성파괴(Ductile Fracture), 즉 사전 징후에 해당하는 소성변형 후에 천천히 파괴가 진행되어 균열의 전파속도가 훨씬 느리다.

“좋은 물건, 뛰어난 기술은 시장에서 통한다는 확신이 있어요. 가격은 좀 나가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을 사서 오래 쓰는 분들이 있잖아요. 흔히 말하는 명품이 여기에 들죠. 초기 투자비용은 좀 높더라도 안전성, 유지관리의 경제성과 편의성, 공간 효율 측면에서 HRX19는 그만한 효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건은 가격이다. 소재, 공정의 특성상 HRX19 강재 가격이 기본적으로 높고, 용접 시공에 대한 기술료도 고려해야 한다.
장 대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 강재를 들여와 국내 수요에 맞는 용접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그래야 가격경쟁력이 생기죠. 수소충전소에 들어가는 우선순위제어패널 같은 패키지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내놓으면 시장에서 반응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올해 1월 16일부로 한국가스안전공사 KGS 코드에 ASTM XM19 강재가 등록되면서 현장 시공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XM19와 동등 이상의 성능을 확보하고 있는 HRX19도 국내 시공이 가능해졌다. 케이비테크가 사업화에 속도를 내고 있는 이유이다.
“수소충전소뿐 아니라 튜브트레일러, 수소전기차의 배관설비에도 큰 이점을 제공해요. 특히 드론이나 UAM(도심항공모빌리티)처럼 단 몇 그램의 무게를 줄이거나 공간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하는 모빌리티 분야에서 높은 수요를 기대할 수 있죠. 이런 쪽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HRX19의 시장 수요는 한정돼 있다. 700바 이상 초고압 환경에 맞는 수소기체에 특화된 강재다 보니 시장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일본제철이나 본고압공업의 입장에서도 한국의 수소 시장에 관심을 둘 만하다. 케이비테크가 그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