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몇 년간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수소경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었다가 어느새 그 열기가 다소 식어버린 느낌이 든다. 이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수소 기술의 상용화 지연, 높은 비용,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기술적 문제 등은 분명히 수소의 성장을 저해하는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재생에너지 보급이 빠르게 확산함에 따라 대규모 에너지 저장이 절실히 필요해지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이때 그린수소는 배터리 기반의 에너지저장시스템(ESS)과는 차별화된 장점을 제공할 수 있는 중요한 기술로 다시 한번 주목받아야 한다.
특히 한국이 추진 중인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전력망 개편 과정에서는 그린수소와 같은 장시간 에너지 저장 솔루션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린수소의 잠재력에 대한 논의가 충분하지 않으며, 대규모 에너지 저장 수단으로서의 그 역할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린수소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살펴보고, 이를 뒷받침할 해외 사례를 통해 한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린수소와 배터리 ESS의 비교
우선 현재 에너지 저장 기술 중 가장 많이 논의되는 배터리 ESS와 그린수소의 차별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배터리 ESS는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을 보완하는 단기 에너지 저장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태양광 발전이 밤에 멈추거나 풍력 발전이 바람이 불지 않는 날씨 조건에 영향을 받을 때 배터리 ESS는 즉각적으로 저장된 전력을 방출해 전력망의 변동성을 줄여준다.
그러나 배터리 ESS는 단기적인 에너지 저장에 적합할 뿐 장기적으로 대규모 에너지를 저장하고 방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배터리의 용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소하며, 대규모 저장 용량을 유지하려면 비용이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또한 배터리 제조와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반면 그린수소는 장기 에너지 저장에 적합한 기술이다. 그린수소는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공급받아 물을 전기분해하여 수소를 생성하며,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수소는 저장 기간에 제한이 없다는 점에서 장시간에 걸쳐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계절 간 전력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예를 들어 여름철에는 태양광 발전량이 많아도 전력 수요가 적은 경우가 있는데, 이때 남는 전력으로 그린수소를 생산하고 이를 저장해 두었다가 겨울철에 에너지가 필요할 때 수소를 다시 전력으로 변환해 사용할 수 있다.
그린수소는 전력망의 안정화 외에도 배터리 ESS와는 달리 산업용 연료, 난방·운송 부문의 연료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장점을 제공한다. 한국이 장기적으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기반의 전력망을 구축하려 한다면 그린수소는 전력 수급을 안정화하는 것 외에도 국가 전체의 에너지 전환을 지원할 수 있는 필수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린수소를 활용한 에너지 저장 성공 사례
그린수소의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해외 사례들을 살펴보자. 이는 한국이 향후 그린수소의 역할을 어떻게 확대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독일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수소 활용에 적극적인 나라로, 그린수소를 통한 장기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독일의 '하이윈드(HyWind)' 프로젝트는 해상 풍력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력을 이용해 수소를 생성하고, 이를 대규모로 저장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는 독일 북부의 풍부한 해상풍력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전력망의 변동성을 최소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이윈드 프로젝트의 성공은 재생에너지와 수소의 결합이 단순한 이론적 개념이 아니라 실질적인 에너지 저장 솔루션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독일의 사례는 한국이 풍력 발전을 확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참고할 만한 중요한 모델이다.
호주는 풍부한 태양광·풍력 자원을 바탕으로 그린수소 생산을 선도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특히 ‘Asian Renewable Energy Hub’ 프로젝트는 그린수소 생산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호주 내에서 생산된 그린수소를 아시아 국가들에 수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태양광·풍력 발전을 통해 생산된 잉여 전력으로 수소를 대량 생산해 저장하고, 이를 수출함으로써 글로벌 그린수소 시장 진출을 가속화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호주의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는 한국이 동북아시아 에너지 허브로 발돋움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한국도 재생에너지와 그린수소를 결합해 자국 내 전력망 안정화뿐만 아니라 향후 수소경제에서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린수소 생산 단가 절감 방안
그린수소가 대규모 에너지 저장 솔루션으로 주목받기 위해서는 기술·경제적 도전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그린수소 생산 단가를 낮추는 것이 핵심이다. 그린수소는 전기분해를 통해 물에서 수소를 추출하는 방식으로 생산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전력의 원가가 수소 생산 단가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재생에너지의 출력을 극대화하고, 변동성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중요한 전략은 재생에너지 출력이 부족할 때 계통 전기를 활용하는 방안이다. 계통 전기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으로서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과 호주의 사례처럼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부족한 시점에 계통 전기를 사용해 수소를 생산하면 연간 수소 생산량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계통 전기를 통해 수소 생산을 유지하면 수소 생산 시설의 연간 가동 시간이 40%에서 80%로 증가할 수 있으며, 이는 그린 수소의 생산 단가를 20~30%까지 절감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한국도 계통 전기의 잉여 전력을 활용하는 전략을 고려해볼 만하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잉여 전력이나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대의 계통 전력을 활용해 수소를 생산하면 그린수소 생산의 경제성을 더욱 높일 수 있다. 이 같은 통합된 에너지 관리 방식은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수소 생산 단가를 낮추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만으로 수소를 생산하는 것보다 계통 전기를 함께 활용할 경우 연간 가동 시간이 늘어나며 수소 생산 시설의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전력망의 변동성을 완화하는 차원을 넘어서 그린수소 생산을 경제적으로 더 유리하게 만들어 대규모 상용화 가능성을 높이는 중요한 전략이 될 수 있다.
한국 전력망의 경우 계통 전력에서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의 비중이 점차 커지는 상황이다. 이런 배경에서 잉여 전력이 발생할 때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야간 시간대에 원자력 발전에서 남는 전력을 사용해 수소를 생산하거나 낮 시간대 태양광 발전이 최대 출력을 기록할 때 그 잉여 전력을 수소 생산에 투입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전력망에서의 전력 낭비를 줄이는 동시에 그린수소 생산량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린수소 산업 발전을 위한 제언
한국은 이미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미래 전력망 체계를 구상하고 있으며, 재생에너지와 그린수소 인프라의 확대는 필수적인 과제가 될 것이다. 그린수소는 단순한 에너지 저장 수단을 넘어 미래 전력망의 안정성과 지속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는 중요한 기술이다. 정부와 민간 모두가 한 방향으로 힘을 합쳐 기술 개발, 제도 수립, 인프라 구축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그린수소 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정책적 비전이 필요하다. 현재의 수소경제 로드맵은 아직 그 구체성이 부족하다. 그린수소 생산을 위한 명확한 목표와 단계별 실행 계획이 필요하다. 정부는 그린수소 생산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확대하고, 관련 인프라 구축을 위한 규제 완화 및 제도적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 또 전력망 운영에서 수소 생산을 염두에 둔 장기적인 전력 수급 계획이 필요하다.
그린수소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 개발이 필수적이다. 현재 수소 전기분해 기술은 여전히 높은 비용을 요구하고 있어 이를 낮추기 위한 연구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져야 한다. 다양한 테스트베드를 구축해 실제 전력망에서 그린수소의 생산·저장과 활용 가능성을 검증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특히 한국이 계획 중인 해상풍력 발전과의 연계를 통해 그린수소 생산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그린수소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는 국가들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할 필요도 있다. 독일, 호주, 일본과 같은 국가들의 성공 사례를 참고하고, 그들과 기술 및 노하우를 공유해 글로벌 수소 경제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국제적 협력은 수소경제의 상용화 시기를 앞당길 뿐만 아니라 한국이 글로벌 수소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린수소는 한국의 전력망 안정화뿐만 아니라 재생에너지의 확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중요한 에너지 저장 기술이다. 특히 장시간 대규모 에너지 저장이 가능한 그린수소는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전력망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린수소의 경제성을 높이기 위한 재생에너지와 계통 전력의 통합적인 활용 방안은 한국이 나아가야 할 중요한 전략적 방향이며, 이를 통해 수소경제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