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훈희 테크로스 전문위원 | 유럽연합이 2023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총 온실가스 배출에서 운송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은 2022년 기준 약 15%였다. 이는 전력산업 부문, 산업 연소·공정 부문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비중이고, 1990년 대비 2022년까지의 증가율(72%) 기준으로도 역시 세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세계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시급하게 운송 부문의 온실가스 배출 감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에 이견은 없어 보인다. 다만 어떤 경로와 기술을 통해 목표로 하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각국 정부, 산업계, 연구기관 등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한 주장과 논쟁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부문 중 운송 부문만 고려해도 육상·해상·항공 영역으로 구분되고, 각 영역은 또 승용인지 화물용인지, 적용되는 운송 수단의 종류가 무엇인지 등에 따라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세세하게 나누어져 있다. 각 세부 영역마다 배터리, 수소(연료전지, 연소엔진), 재생가능 합성연료, 바이오 연료 등 다양한 친환경 배출감축 기술을 영위하는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팽팽하게 경쟁하고 있다.
여기에 각 기술에 필요한 저장·운송·활용 인프라 구축 문제까지 더해지면 셈은 더욱 복잡해진다. 투자 재원은 한정되어 있고 저마다 자기들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정책당국 입장에선 난감한 상황이다. 이는 우리나라 정책당국에도 마찬가지 과제이다. 우리나라는 궁극적인 기후 대응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운송 부문에선 어떤 경로 혹은 기술을 선택해야 할까?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탄소중립 목표에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을까?
최근 Hydrogen Europe이 수행한 무배출 모빌리티 장기전망 설문조사와 KAPSARC(King Abdullah Petroleum Studies and Research Center)가 소개한 모빌리티에서 수소의 미래와 같은 자료들이 운송 부문 온실가스 감축 정책 방향을 검토하는 데 참고자료가 될 수 있겠다.
정책당국은 우선 세세하게 구분된 영역에 하나의 기술, 하나의 연료로 대응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각 지역, 산업, 운송 수단의 종류 등에 따라 독특한 특성과 요건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기술 수준에서 도로 운송의 경우 승용 및 단거리 운송에는 배터리 기술이 상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장거리 운송에는 배터리, 수소, 합성연료 등 보다 다양한 기술 조합이 필요해 보인다. 각 영역의 특성에 적합하게 배터리 충전 및 수소·합성연료 공급 인프라가 구축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인센티브 정책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다양한 청정 기술들이 혼재하는 상황에서는 각 기술이 가진 고유한 특징들을 발전시키면서 서로 경쟁하고 진화해 나갈 수 있도록 기술 중립적인 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다. 특정 기술이나 연료를 선정해 지원하는 정책보다는 각 응용 영역에 가장 적합한 선택지들이 선택될 수 있도록 다양한 해법들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것이 현재로선 바람직해 보인다.
기술과 시장 환경은 외부 조건에 따라 지속해서 변화하는 만큼 정책 환경도 이와 같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혁신을 통해 새롭게 출현하기도 하고 진화하기도 하는 다양한 기술 선택지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정책도 충분히 민첩하고 유연해져야 한다. 또한, 승용차 부문과 같이 기술, 경제성 등의 적합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는 기술과 인프라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재검토해 추가적인 매몰비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냉철하고 결단력 있는 정책도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