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환경규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가 친환경 전환과 사업 다각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지난 1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이하 석유사업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친환경 전환에 대한 투자가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등에 따르면 이번 ‘석유사업법’ 개정안에는 산업부 장관이 지정한 ‘친환경 정제 원료’를 정제공정에 투입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이 신설됐다. 친환경 정제 원료는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폐윤활유, 바이오매스 등을 말한다.
또한 친환경 연료를 바이오연료, 재생합성연료(e-fuel·이퓨얼) 등으로 명시적으로 구분했다. 바이오연료는 곡물이나 식물, 나무, 해조류, 축산폐기물 등에서 추출해 발효시키는 방식으로 만든 연료를 뜻한다. 재생합성연료는 일반적으로 재생에너지 기반 수소와 이산화탄소를 반응시켜 만든 연료를 말한다.
이 외에 친환경 연료의 개발·이용·보급 확대 및 원료 확보 등에 대한 정부의 지원 등이 주요 내용으로 포함됐다.
‘석유사업법’ 개정안 본회의 통과 소식에 이어 정부와 정유업계가 만나 긴밀한 소통과 협력을 다지는 자리도 마련됐다. 정유 4사(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의 대표는 최남호 산업통상자원부 제2차관과의 간담회에서 2030년까지 약 6조 원을 친환경 연료 분야에 투자할 계획임을 밝혔다.
SK이노베이션
국내 정유 4사는 일찍이 친환경 연료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관련 투자를 계속 해왔다.
정유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2023년 11월 일본 최대 종합 에너지 기업 에네오스(ENEOS)와 저탄소 에너지원 개발 등 에너지 전환 대응을 위한 협력방안에 대해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해당 업무협약에 따라 양 사는 지속가능 항공유(SAF·Sustainable Aviation Fuel),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등의 분야에서 힘을 합치기로 했다.
청정에너지원으로서 암모니아에 대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암모니아 기반 연료전지 시스템 전문기업 아모지(Amogy)에 2022년과 2023년 각각 3,000만 달러(한화 약 380억 원)와 5,000만 달러(한화 약 654억 원)를 투자했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 울산Complex(이하 울산CLX)는 2027년까지 약 5조 원을 투자해 넷제로(Net Zero) 달성을 앞당기겠다는 목표를 세우면서 순환경제 구축, 설비 전환과 신·증설에 투자한다고 지난 2022년 10월 밝혔다. 장기적으로는 SAF 생산을 위한 공장 신설 등을 고려할 방침이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은 지난해 10월 ‘바이오 물질 기반 지속가능 항공유(바이오항공유)’ 원료 확보를 구체화하기 위해 폐자원(W&R·Waste&Residue) 기반 원료 업체 대경오앤티에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대경오앤티는 도축 부산물에서 나오는 동물성 지방과 음식점, 식품 공장 등에서 발생하는 폐식용유(UCO·Used Cooking Oil)를 바이오 디젤, 바이오 항공유 등의 원료로 공급하는 국내 기업이다.
같은 해 3월에는 중국 서남 지역 UCO 공급업체 ‘진샹(Jinshang)’에 투자했으며, 2022년 10월에는 가스액체화 기술을 기반으로 수소를 이산화탄소와 합성해 이퓨얼(e-fuel)을 만드는 기술기업 ‘인피니움(Infinium)’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SK이노베이션의 화학 자회사 SK지오센트릭(옛 SK종합화학)은 폐플라스틱 순환 경제 구축에 선도적인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 왔다. 특히 오는 2025년까지 울산에 폐플라스틱 재활용 종합단지인 ‘울산ARC(Advanced Recycling Cluster)’를 조성한다. 지난해 11월 첫 삽을 떴다.
SK지오센트릭은 ‘울산 ARC’ 조성을 위해 미국 퓨어사이클 테크놀로지(PCT), 캐나다 루프 인더스트리, 영국 플라스틱 에너지 등의 글로벌 기업과 전략적 협업 관계를 구축했다.
이와 함께 자사 기술로 열분해유 후처리 공장도 만든다. 앞서 지난 2022년 5월 SK지오센트릭은 ‘폐플라스틱을 활용해 생산한 열분해정제유를 석유정제품의 원료로 사용하는 사업의 외부방법론(이하 ‘열분해유 방법론’)’을 개발해 환경부 인증을 받았다.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는 재활용이 어려운 폐플라스틱을 무산소 상태에서 300~500℃의 고온으로 가열해 만든 기름을 말한다.
GS칼텍스
저탄소 신사업을 본격화하는 ‘그린트랜스포메이션(Green Transformation)’에 집중하고 있는 GS칼텍스는 특히 화이트바이오 생태계 구축을 위해 바이오 사업 전반에 대한 밸류체인 구축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화이트 바이오는 재생가능한 식물자원을 원료로 바이오연료나 화학소재 등을 생산하는 기술을 말한다.
GS칼텍스의 바이오연료는 지난 2023년 8월 친환경 국제 공인 인증인 ‘ISCC EU’를 취득해 주목받았다. ISCC는 유럽연합(EU)의 재생에너지침(RED)에 부합하는 지속가능성 및 저탄소 제품에 대한 국제인증 제도다.
GS칼텍스는 “ISCC EU 인증을 바탕으로 신규 바이오연료의 도입 및 활성화에 기여하고 바이오항공유와 바이오선박유 사업의 경쟁력을 높여 관련 사업을 확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GS칼텍스는 정부가 2022년 10월 발족한 친환경 바이오연료 활성화 얼라이언스에 참여해 친환경 바이오연료 보급 확대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2023년 10월에는 포스코인터내셔널과 합작투자 서명식을 통해 인도네시아 바이오원료 정제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GS칼텍스에 따르면, 양 사는 합작법인을 통해인도네시아 칼리만탄에 2,600억 원을 투자해 바이오원료 정제시설을 건설할 계획이다. 2025년 2분기 상업 가동을 목표로 올해 초 착공된다. 연간 50만 톤의 바이오원료와 식용유지를 생산할 예정이다. 정제시설 등에서 발생하는 폐원료를 회수하는 사업도 공동으로 진행한다.
바이오선박유 관련 사업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바이오선박유는 폐원료 기반 바이오디젤과 선박유(벙커C유)를 각각 3대7 비율로 섞어 생산한 연료를 말한다. 기존 선박 엔진을 개조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지난 2023년 9월에는 국내 대표 선사 HMM과 부산신항에서 바이오선박유 시범 운항을 진행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철강사 포스코, 선사 에이치라인해운과 해운 분야 탄소감축을 위해 손잡았다.
바이오항공유(SAF) 관련 사업도 열심이다. 바이오항공유는 동·식물성 기름이나 폐식용유 등을 가공해 생산하는 지속가능연료다. GS칼텍스는 대한항공과 함께 2023년 6월 바이오항공유 실증 추진 업무협약(MOU)을 체결, 총 6번의 시범 운행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는 정부의 ‘바이오항공유 실증연구 추진 계획’에 따른 것이다.
에쓰오일
에쓰오일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와 두터운 협력 관계를 기반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있다. 아람코는 자회사인 Aramco Overseas Company B.V.(아람코 오버시즈 컴퍼니·AOC)를 통해 에쓰오일의 지분 63.4%(2022년 11월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울산에 9조2,580억 원(70억 달러) 규모의 석유화학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있다. 일명 ‘샤힌 프로젝트’인 이 프로젝트는 세계 최대 규모의 정유·석유화학 스팀크래커(기초유분 생산설비)를 구축하는 사업으로 한국과 전 세계에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석유화학 구성요소(building block) 공급을 지원하게 된다. 2018년 완공된 40억 달러 규모의 1단계 석유화학 프로젝트의 후속이다.
‘샤힌 프로젝트(Shaheen·아랍어 ‘매’)’는 광범위한 탄소 중립을 목표로 하는 친환경 에너지 화학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다지는 에쓰오일의 야심 찬 석유화학 확장 사업이다. 에쓰오일에 따르면 아람코의 첨단 TC2C(Thermal Crude-To-Chemicals) 기술을 적용해 플라스틱을 비롯한 합성수지 원료로 쓰이는 고부가가치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게 된다. 2023년에 건설 공사를 시작해 2026년 완공 예정이다.
‘샤힌 프로젝트’의 심장 역할을 하는 기술개발 연구동인 ‘에쓰오일TS&D센터’도 준공했다. 서울시 강서구 마곡동에 세워진 ‘에쓰오일TS&D센터’는 지난 2017년 준공된 폴리머연구동, 윤활유연구동과 함께 고품질, 고부가가치의 석유화학 및 윤활 제품 개발, 저탄소 신에너지 분야에 대한 기술개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게 에쓰오일의 설명이다.
국내 친환경 석유대체연료 사업도 본격화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지난 1월 29일 바이오 원료(폐식용유, 팜 부산물 등)와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초도 물량을 정유 공정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바이오원료와 플라스틱 열분해유를 기존 정유 공정에 원유와 함께 투입, 처리해 탄소집약도가 낮은 저탄소 연료유(지속 가능 항공유, 차세대 바이오디젤 등)와 친환경 석유화학 원료(나프타, 폴리프로필렌 등)의 생산을 개시한 것이다. 바이오원료의 정유 공정 투입은 국내 정유사 중 최초다.
수소 산업에도 적극적이다. 지난 2022년 1월 국내 수소 생태계 조성을 위해 사우디 아람코와 ‘한-사우디 스마트 혁신성장 포럼’에서 업무협약을 체결, 블루수소와 블루암모니아를 국내에 도입하기로 하는 등 대체 에너지 협력 강화를 위한 공동 노력을 약속했다.
또한 수소연료전지 전문기업인 에프씨아이(FCI)에 대한 지분 투자를 했고, 삼성물산과 친환경 수소 사업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HD현대오일뱅크
블루수소, 화이트바이오, 친환경 화학·소재 사업을 3대 친환경 미래 사업으로 선정한 HD현대오일뱅크는 각 신사업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HD현대오일뱅크는 충청남도 서산시에 위치한 대산공장 내 고순도 수소 정제 설비를 구축한 데에 이어 사우디 아람코와 암모니아 도입을 위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아람코로부터 암모니아를 도입해 수소를 생산하고, 이 수소를 대산공장 내 각 공정에 투입하거나 차량용 수소 연료로 판매할 예정이다.
또한 총 4,000억 원을 투자해 LNG와 블루수소를 연료로 사용하는 친환경 발전소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발전 자회사 현대E&F(현 HD현대E&F)는 오는 2025년 상업가동을 목표로 스팀 230톤/h, 전기 90MW 용량의 발전 설비를 구축한다.
차세대 화이트 바이오 사업도 추진한다. 이 사업의 로드맵의 1단계로 차세대 바이오디젤 제조공장을 건설하고, 대산공장 내 일부 설비를 수소화식물성오일(HVO) 생산설비로 전환할 예정이다.
2단계로는 HVO를 활용한 차세대 바이오 항공유를 생산해 글로벌 시장 개척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또 중질유 기반 석유화학 설비인 HPC(Heavy feed Petrochemical Complex)에도 HVO를 원료로 투입해 바이오 기반 석유화학 제품까지 활용도를 높일 계획이다.
HPC공장은 HD현대오일뱅크와 롯데케미칼의 합작사인 HD현대케미칼이 3조 원 이상을 투자한 초대형 석유화학 설비다. 연간 에틸렌 85만 톤, 프로필렌 5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다. HPC에서는 기존 석유화학 공정의 주원료인 납사에 비해 저렴한 탈황중질유, 부생가스, LPG 등 정유 공정 부산물을 시황에 따라 선택적으로 투입할 수 있다.
로드맵의 3단계에서는 2026년까지 글리세린 등 화이트 바이오 부산물을 활용한 바이오케미칼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바이오원료 수급엔 선제적으로 나섰다. 지난 2023년 10월 코린도그룹, LX인터내셔널과 각각 연간 4만 톤씩 총 8만 톤 가량의 PFAD(팜잔사유)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 PFAD는 팜유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산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HD현대오일뱅크는 PFAD 외에도 사용하고 버려지는 식용유를 재활용해 바이오디젤 공장의 원료로 사용할 계획이다.
이보다 앞서 지난 2021년에는 대산공장 내 바이오항공유 생산 공장 건립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이목을 집중시켰다.
친환경 화학·소재 사업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2022년 가동을 시작한 HPC공장을 통해 올레핀 분야까지 진출, 석유화학 분야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한층 다각화한 것이다. 특히 태양광 패널 소재 EVA 생산능력은 30만 톤(2022년 준공 당시 기준)에 달한다.
향후 기초 소재, 에너지 소재, 2차전지 소재, 바이오 소재 등 친환경 화학소재를 중심으로 석유화학 다운스트림 사업을 더욱 확대할 계획이다.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이하 한국타이어)와 국내 폐타이어 순환 경제모델도 구축한다. 기존 타이어 생산을 위해 사용했던 화학 원료를 폐타이어를 수거해 만든 재활용 원료로 대체하는 순환경제 모델인 ‘한국형 블랙사이클’ 컨소시엄에 참여해 △폐타이어 수거 후 열분해유 생산 △열분해유를 정제해 타이어 원료 생산 △재활용 원료로 최종 타이어 제품 생산 등에 협력하기로 한 것이다.
HD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계열사인 HD현대케미칼, HD현대오씨아이와 함께 기존 설비를 활용해 폐타이어 열분해유를 정제해 타이어 원료로 쓰이는 납사, 부타디엔, 카본블랙, 프로세스 오일 등의 순환 제품을 생산해 최종적으로 한국타이어에 공급한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