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산 105조, 종합 에너지 기업 출범.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법인이 11월 1일 공식 출범했다. 합병 발표 후 3개월 만에 자산 105조 원 규모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대표하는 민간 최대 종합 에너지 회사가 닻을 올렸다.
수소업계가 궁금한 것은 SK E&S의 행보다. 추형욱 사장이 이끄는 SK E&S는 SK이노베이션에 CIC(Company In Company, 사내독립기업) 형태로 합병됐다. 추형욱 사장은 SK이노베이션 사내이사로 사장직을 이어가게 됐다.
활용 부문에 치우친
국내 수소업계에 ‘밸런스’ 제공
SK그룹은 올해 초부터 리밸런싱(Rebalancing) 작업에 몰두해왔다. 그룹의 실적 부진, 중복 투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개가 넘는 계열사의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선 것이다.
리밸런싱은 운용하는 자산의 편입 비중을 재조정하는 것을 말한다. 주식이나 채권의 포트폴리오 비율을 조정해 변동성을 줄이고 추가 수익을 얻는 데 목적이 있다. 이는 투자자의 눈으로 현 상황을 냉철하게 진단해서 접을 건 접고 합칠 건 합치겠다는 뜻이다.

그동안 SK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수소사업은 맥킨지나 보스턴컨설팅그룹으로부터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룹 내 수소사업추진단을 해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4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SK그룹은 2020년 12월 수소사업을 육성하기 위해 SK이노베이션, SK E&S 등 관계사 전문 인력 20여 명으로 구성된 ‘수소사업추진단’을 신설했다. 시장은 이를 두고 SK가 수소의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해 수소 시장에 뛰어드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였다.
2021년 9월 8일에 수소기업협의체가 의욕적으로 출범했다. SK는 현대자동차, 포스코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해 3월에 열린 제3차 수소경제위원회에서는 “향후 5년간 약 18조 원을 투자해 액화수소 생산기지, 충전소 등 수소생태계 구축을 위한 인프라에 투자하겠다”며 수소사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SK의 참여는 국내 수소 인프라 확대에 큰 힘이 됐다. 수소의 생산, 유통, 공급에 이르는 밸류체인 전반에 사업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어 활용 부문으로 기운 국내 수소산업에 ‘밸런스’를 찾아줄 것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SK는 석유, 천연가스로 대표되는 에너지 생태계를 조성한 경험이 있다. 그 역량을 살려 수소에너지 밸류체인을 빠르게 구축할 수 있다. 또 국내 수소사업을 기반으로 해외 시장에도 진출할 계획이었다.
SK는 인천에 연간 3만 톤 규모의 액화수소플랜트를 짓기로 했다. SK이노베이션의 자회사인 SK인천석유화학에서 나오는 부생수소를 액화해 수도권에 유통하는 그림을 그렸고, 이는 올해 현실이 됐다. 또 SK에너지의 주유소와 내트럭하우스 등을 그린에너지 서비스 허브로 활용하고, 발전용 연료전지를 적용한 미래형 융복합 충전소인 ‘에너지 슈퍼스테이션’ 사업을 추진해왔다.

다만 수소 수요는 빠르게 늘지 않았고, 투자의 성과는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액화수소충전소 구축 일정이 늦어지면서 대규모 수요처 확보 시점은 지연되고 있다. 수소 개질에 따른 연료비 부담, 탄소배출에 대한 우려로 연료전지 시장도 좀처럼 기를 못 펴고 있다.
SK E&S가 충남 보령에서 한국중부발전과 함께 추진해온 총사업비 2조1,000억 원 규모의 블루수소 생산 플랜트 사업도 축소가 불가피해 보인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성환·김한규 의원실이 11월 11일 중부발전에서 제출받은 자료에도 당초 생산 목표였던 연간 25만 톤에서 절반 수준인 12만5,000톤으로 줄여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또 수소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SK이노베이션이 소유한 광양의 LNG복합발전소를 보령으로 이전하는 계획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상 블루수소의 수요를 가스발전 혼소 용도로만 구성하고 있어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크지 않고 RE100 대응에도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SK이노베이션의 캐시카우
에너지솔루션 사업으로 ‘시너지’ 기대
전기차 시장의 수요 둔화로 배터리 업계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실적 악화는 배터리 자회사인 SK온의 자금난과 관련이 있다. 현금 흐름의 숨통을 트기 위해 SK E&S라는 구원투수를 마운드로 불러들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SK E&S는 현금 창출 능력이 뛰어난 알짜기업이다. 지난해만 매출 11조1,671억 원에 영업이익으로 1조3,317억 원을 벌었다. 이는 SK이노베이션의 영업이익(1조939억 원)을 웃돈다. SK E&S는 CIC(사내독립기업)라는 낙인이 찍힌 ‘캐시카우’로 볼 수 있다.

다행히 SK온의 최근 3분기 실적은 나쁘지 않았다. 출범 후 3년 만에 적자 탈출에 성공하며 실적 회복의 신호탄을 쐈다. 하지만 이번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전기차 시장은 더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본업인 석유화학 부문에서도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예견된 악재이기도 하다. 석유화학은 산업 부문에서 철강에 이어 두 번째로 온실가스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업종이다. 탈탄소, 탄소중립에 대한 요구가 거센 만큼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위해 몸집을 줄여가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울산의 석유화학단지 같은 곳을 차로 가로지르다 보면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된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수출 비중이 높고 생산 플랜트가 주로 국내에 있다. 앞으로 트럼프의 친화석연료 정책이 글로벌 에너지 시장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면서 중국과의 경쟁에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번 합병을 계기로 SK이노베이션은 에너지솔루션(Energy Solution) 사업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사업 부문으로 보면 SK이노베이션이 정유·석유화학·배터리 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SK이노베이션 E&S가 도시가스판매업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태양광·풍력), 수소 사업을 맡게 된다.
SK그룹은 지난 7월 합병 추진 소식을 전한 직후 ‘통합 시너지 추진단’을 출범시켰다. 추진단에서 처음 한 일은 △LNG 밸류체인 △트레이딩 △수소 △재생에너지를 ‘퀵-윈(Quick-Win)’ 4대 사업영역으로 설정한 점이다.
언뜻 봐도 미래 에너지 사업의 주도권을 ‘SK이노베이션 E&S’가 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SK이노베이션 E&S는 CCS 기술을 기반으로 저탄소 LNG 사업모델을 전개하고, 국내외에서 매년 1GW 규모의 재생에너지를 확보할 계획이다.
전남 신안군 자은도 북서쪽 공유수면에 건설 중인 96MW 규모의 전남해상풍력 1단지가 대표적이다. 2023년 초 프로젝트 자체 신용만으로 별도의 보증 없이 자금 조달에 성공한 민간 주도 대규모 해상풍력 사업으로 내년 3월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한다. 11월 18일 시운전 개시를 기념해 한덕수 국무총리가 목포신항만 현장을 다녀가기도 했다.

“내년 상반기 전남해상풍력 1단지 준공을 계기로 민간 투자가 본격화되면 향후 세계 최대 규모(8.2GW 용량)로 조성될 전남 해상풍력발전단지 개발 사업에 한층 탄력이 붙을 것”이라는 것이 SK이노베이션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생에너지에서 나온 전기를 에너지저장장치(ESS)로 받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 전력을 수소로 전환하면 치즈처럼 오래 저장해두고 유통할 수 있다. 전기와 가스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무탄소 연료인 수소가 주목을 받은 이유이다.

무탄소 에너지를 그리드상에서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에너지솔루션 사업이 뜬 것은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SK이노베이션이 주목하는 미래 수소에너지 사업모델은 여기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SK이노베이션 E&S는 해상풍력을 중심으로 한 재생에너지 용량 확보에 공을 들이고 있고, 이는 수전해와 연계한 그린수소의 생산, 유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리밸런싱 다음은 혁신
‘투자’와 ‘기술’의 밸런스
자산 105조. 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에너지 부문은 기본적으로 덩치가 크고 그 규모만으로 사업의 내실을 평가하기가 어렵다.
SK는 자체 연구개발(R&D)보다는 인수합병(M&A), 합작회사(JV) 설립을 통해 몸집을 불려왔다. SK E&S가 2022년 1월 아시아 수소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미국의 플러그파워와 ‘SK플러그하이버스’를 설립한 일이 대표적이다.

SK플러그하이버스는 인천 액화수소플랜트의 상업 가동 시점에 맞춰 액화수소충전소를 구축해 운영하고 있다. 또 제주도에서 플러그파워의 PEM 수전해를 활용한 수전해 사업을 추진해왔다.
국내를 비롯한 글로벌 수소 시장은 여전히 초기 단계다. 초기 산업의 리스크를 안고 도전적으로 사업에 임하고 있다. 그래서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 지원이나 기술 실증사업이 매우 중요하다.
제주특별자치도 핵심 사업으로 동복·북촌풍력발전단지에서 추진 중이었던 12.5MW 그린수소 실증사업이 올해 R&D 예산 삭감으로 10.9MW로 규모가 줄었다. SK플러그하이버스는 5MW 단일 용량의 PEM 전해조를 개발해 실증에 참여할 계획이었으나, 예산이 삭감되면서 사업을 포기했다.
이번 국책과제 주관사인 한국남부발전의 관계자는 “플러그파워가 5MW PEM 전해조를 개발해 실증에 참여하기로 했다”라며 “용량을 낮춰 새로 개발하는 것은 무리라며 사업 포기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과제비에 맞춰 이미 개발을 완료한 1MW급 전해조 몇 개를 붙여서 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SK플러그하이버스가 빠진 자리를 채우기 위해 공개 입찰을 진행했고, 두산에너빌리티가 참여하기로 결정이 났다. 두산에너빌리티는 두산퓨얼셀 아메리카의 자회사인 하이엑시엄(HyAxiom)에서 개발 중인 PEM 수전해를 현장에 넣게 된다.
이는 정부의 R&D 예산이 당초 103억4,200만 원에서 28억3,000만 원(27.4%)이 삭감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고 정부 탓만 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SK의 수전해 기술이 전적으로 플러그파워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SK에코플랜트가 블룸에너지와 합작법인(블룸SK퓨얼셀)을 세워 국내에서 발전용 연료전지(SOFC)와 고온 수전해(SOEC)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스택 등 핵심 기술을 들여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혁신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외국 기업의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성장의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
‘리밸런싱’은 균형(Balance)을 다시 맞춰간다는 뜻이다. 이보다는 ‘이노베이션(Innovation, 혁신)’이라는 말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SK이노베이션이라는 사명 안에 이미 답이 들어 있는 셈이다.
최근 SK에너지, SK지오센트릭, SK아이이테크놀로지 등 SK이노베이션 계열사 3곳에 사장단 인사를 단행하면서 엔지니어, 연구원 출신을 앉힌 점은 고무적이다.
기업은 ‘투자’와 ‘기술’의 관점에서 밸런스를 찾아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SK만의 숙제는 아니다. 그 균형감을 바로 잡아야 자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글로벌 시장의 리스크에 휘청하다 바닥에 무릎을 찧는 일을 그나마 줄일 수 있다.